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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마코-추억 하나

Air Lee 2015. 8. 12. 15:18

2015.08.12



한 소녀가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여자아이 몇 명이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 그것을 바라보는 소녀의 두 눈은 강한 열망과 동경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저 눈을 알고 있다. 내가 오랫동안 해온 생각을 저 소녀도 하고 있으리라.

왜 저 여자아이들은 치마를 입고 인형을 손에 들고 걸어가고 있을까, 왜 저 여자아이들은 머리가 길고 거기에 예쁜 리본이나 핀을 달고 있을까. 그 의문은 점차 자신에게로 초점을 맞춰간다. 왜 나는 긴 머리 대신 짧은 머리를 하고, 인형 대신 글러브를 들고 있을까?

그 소녀는 누가 봐도 남자아이라고밖에 생각하지 못할 외양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나는 그 아이를 본 것만으로 여자애라는 것을 알아챈 걸까. 그건 마치, 어린 시절의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에. 아니, 그게 아니라 그건 정말로 나 자신이었다. 소녀가 있는 방 안에는 어릴 때 내가 쓰던 물건들이 보였고, 소녀의 뺨에 난 상처는 어릴 때의 사진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시야가 넓어지더니, 커다란 집이 한 눈에 들어오고 방 안의 소녀는 작게 보였다. 틀림없이 예전에 살던 집이다. 나는 내가 과거의 나를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의 실체는 거기에 없었다. 어떤 풍경을 보고 있다는 의식만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건, 아마도 꿈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 방 안의 소녀-어린 시절의 자신-가 어느새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찾아볼 필요도 없이 곧바로 집 밖으로 나오는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내 의식 역시 그 애를 쫓아갔다. 익숙하기도 낯설기도 한 거리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간다. 소녀는 주택가를 벗어나 상점가로 들어섰다. 그제야 나는 그 아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눈치 챘다.

횡단보도 앞에서 멈춰선 소녀의 눈은 정확히 맞은편 인도의 상점에 고정되었다. 조금 전 창밖으로 지나가는 여자아이들을 바라볼 때보다 더 강한 열망이 담긴 눈이다. 어린 아이 특유의 욕망과 순수가 가득한 눈빛으로, 소녀는 가게 쇼 케이스에 진열된 인형 하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어릴 때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무척 인기 있었던 캐릭터 인형이다. 그건 내가 처음으로 가지게 된 인형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걸 어떻게 가지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신호가 바뀌었지만 소녀는 건널 생각을 하지 않고 여전히 그 인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만지면 부드러울 것 같은 머리카락은 꼭 진짜 같았고 검은 두 눈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같았다. 소녀의 얼굴에 숨김없이 드러나는 욕망을 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나도 갖고 싶어 하지만,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을 막연히 바라보고 있는 감정은 어떤 것일까. 저 때의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나이였다. 그 어린 아이가 그런 감정을 얼마나 깊이 느낄 수 있을까? 겨우 횡단보도 하나만큼의 거리를 두고서, 어떻게 바라보기만 할 수 있을까?

좀 더 어릴 때에는 나 자신에게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 짧은 머리, 각종 스포츠, 남자 말투와 남자아이 옷들까지도. 하지만 그것들은 내가 좋아서 한 것이 아니다. 나에게는 선택할 기회가 없었다, 아버지는 나를 그렇게 키우셨고, 나는 그게 당연한 건 줄만 알았다. 그러나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다른 여자아이들은 나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깨달았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남자아이 같은 행동이나 기호 등은 이미 내 피를 타고 흐르고 있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이따금 이렇게 몰래 밖으로 나와서, 여자아이다운 것을 동경하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이제 곧 소녀는 크게 한숨을 한 번 쉬고, 인형에 고정된 눈을 천천히 떼어내고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너무나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뒤를 돌아도 여전히 그 인형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던 감각까지도.

소녀가 등을 돌리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 달려와 세게 부딪혔다. 크게 넘어질 뻔 하지만 탁월한 운동신경으로 몸의 중심을 잡고 버틴다. 그러나 상대방은 그러지 못 했다.

-아야야.

-괜찮아?

소녀는 다급히 부딪힌 상대에게 다가간다. 딱 제 나이 또래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신음하고 있었다. 그 아이의 무릎이나 팔꿈치가 반창고 투성이인 것을 보고 순간 놀랐지만, 방금 부딪힌 것 때문에 그런 상처가 생길 리는 없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다행히 여자아이는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소녀가 내민 손을 붙잡고 일어나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수줍게 웃는다.

-미안해, 난 정말 자주 넘어지거든. 넌 다친 데 없니?

-, 난 괜찮아.

소녀는 그 여자아이가 무사한 지 확인하느라 바닥에 떨어진 인형을 미처 못 보고 있었다. 거기에 눈이 미치자 자기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을 들이킨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던 것이다. 여자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인형을 주워들더니 먼지를 탁탁 털고 껴안았다. 그 장면을 멍 하니 바라보고 있던 소녀는 가까스로 묻는다.

-그거 네 거니?

-, 아빠가 선물로 사 주신 거야.

아빠가 소녀는 마른침을 삼킨다. 인형을 들고 생긋 웃고 있는 여자아이는 머리에 커다란 리본을 두 개나 달고, 프릴이 달린 치마를 입고 있어 누가 봐도 여자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귀여웠다. 소녀는 이번에도 표정에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여자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갖고 싶니?

-.

-그럼 부모님께 사달라고 해.

-우리 부모님은 이런 것 안 사주셔.

소녀가 힘없이 말한다. 여자아이는 놀라서 다시 묻는다.

-?

-나를 남자아이로 키우고 싶어 하시니까.

-? 그럼 너 여자애야?

여자아이는 아까보다 더욱 크게 놀라며 눈을 휘둥그레 뜬다. 소녀는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

-그렇구나.

여자아이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부끄러운지 소녀는 고개를 돌렸다.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다. 마지막으로 인형을 향해 미련이 담긴 시선을 던지며 소녀는 말했다.

-그럼, 난 갈게.

-잠깐 기다려!

돌아서려는 소녀를, 여자아이가 다급히 부른다. 그러더니 손에 들고 있던 인형을 소녀 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이거, 너 가져.

소녀는 영문 모를 표정으로 인형과 여자아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 ?

-부딪힌 것에 대해 사과하는 의미야. 난 괜찮아. 그렇게 갖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다음에 또 구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너는 정말로 갖고 싶어 하는데, 가질 수가 없잖아.

그런 말을 들어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안 돼. 이렇게 비싼 걸. 난 돈도 없는걸.

-정말 괜찮아, .

소녀는 엉겁결에 인형을 받아들고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잠시 말을 잃은 듯이 보였다. 나 역시 놀라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니, 전혀 기억하지 못 하고 있었다. 저 여자아이는 어떻게 저렇게 간단히 자기 인형을, 처음 보는 아이한테 줘버릴 수 있을까? 너무 어려서 소유물에 대한 강한 의식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볼수록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든다. 어디선가

소녀는 인형을 꼭 껴안고 웅얼거리며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그리고 여자아이가 마음을 바꿀까봐 걱정되는 듯 재빨리 돌아서서 집을 향해 달려간다. 저기서부터는 알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에 인형을 숨기고, 틈만 나면 들여다보며 행복에 젖을 것이다. 그 뒤로 얼마 안 가 이사를 가버렸기 때문에, 그 여자애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인형은 내가 여자아이라는 것을 잊지 않게 해주는, 그리고 여자아이다운 것에 대한 동경을 잃지 않게 해주는 각인이 되었다.

소녀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여자아이는 생긋 웃더니 자기도 집으로 돌아가려는 듯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몇 발자국 못 가서 또 넘어지고 말았다. 그 넘어지는 동작을 보자, 누군가가 떠오르는 동시에 꿈에서 깨어났다.

 

내가 그런 중요한 기억을 잊고 있었던 건, 어쩌면 그 여자아이에게서 인형을 빼앗았다는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무의식적인 도피였을지도 모른다. 사실 빼앗은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오늘 사무소에서 하루카를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우물쭈물하며 피하는 것은 나와 맞지 않는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사무소의 문을 열었다.

안녕- 다들 좋은 아침!”

, 마코링이다!”

마코토, 어서 와.”

보이는 순서대로 인사를 하며 사무소 안으로 들어섰다. 가방을 소파 위에 내려놓고, 모두가 모여 있는 테이블 안쪽으로 걸어갔다. 테이블 위에는 여러 장의 사진이 놓여 있고 다들 거기에 유심히 집중하고 있었다. 한가운데의 의자에 앉아 있던 하루카는 고개를 들고 나를 보더니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마코토, 안녕!”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 웃음을 보자 가슴 한 쪽이 시큰 아려 왔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마주보고 인사하며 다른 애들처럼 테이블 위로 관심을 던졌다.

, 이것들 다 뭐야?”

, 우리가 이번에 출연하는 예능 프로에서 아이돌들의 어린 시절을 집중 취재한대! 그래서 다들 자기가 어릴 때의 사진을 꺼내놓고 구경 중이야.”

맞다, 그런 게 있었지.”

나는 슬쩍 하루카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하루카는 눈을 반짝거리며 정신없이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들 정말 귀여워!”

아하, 마코토 군의 사진은 여기 있다는 거야!”

미키가 손가락으로 내 사진을 짚으며 말했다.

마코토 군은 어릴 때도 멋있었네!”

정말~ 꼬마 왕자님 같아.”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그냥 쓴웃음을 지었다. 그 때, 하루카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자 신경이 곤두서고 말았다. 사진 속의 하루카는 바로 그 인형을 들고 있었다.

하루카, 이거.”

? , . 그거 나야.”

하루카, 지금이랑 완전히 똑같네.”

치하야가 반쯤 감탄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저기, 그런데 이 인형 말이야.”

, 이거 우리가 어릴 때 유행했던 그 인형 맞지? 나도 가지고 있었는데.”

유키호가 반갑다는 듯이 가까이 다가와서 말했다. 하루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마코토랑 유키호는 잘 알겠네. 정말 여자애들 사이에서 엄청 인기가 있었지-.”

나도 알고 있어.” 치하야가 말했다.

흐응- 미키는 모르겠는데. , 이 데코쨩 지금보다 더 데코쨩 느낌!”

데코쨩이라고 하지 말라니까!”

미키와 이오리가 옥신각신하는 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허리를 낮추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이거, 아직도 가지고 있어?”

? 아니아마 없을걸.”

?”

글쎄, 잃어버렸나너무 어릴 때라 잘 기억이 안 나.”

하루카의 말에 나는 그만 안심하고 말았다. 나만 잊고 있었던 게 아니구나, 그러나 곧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왠지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왠지 좋은 추억이 있었던 것 같아.”

하루카는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었다. 꿈에서 보았던 어린 시절의 웃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웃음이었다. 그 순간 나는 다시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가질 수 없는 아름다운 인형을 바라보던 그 소녀처럼- 하루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마코토, 그건 왜?”

? , 아니-아무것도.”

나는 대답하다 말고 잠시 생각한 뒤 말을 이었다.

……나도, 좋은 추억이 있었던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