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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판 유리안나

Air Lee 2015. 9. 1. 23:58

2015.09. 배경은 무비마스 갈등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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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에서, 댄스를 지금의 구성 그대로 두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 누구 있어?”

그 말이 나온 순간, 그대로 보이지 않는 짐이 되어 공간을 무겁게 짓누른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다른 아이들을 살펴보았다. 하루카 씨의 말을 듣자 시호와 나오가 가장 먼저 손을 들었고, 뒤이어 미나코도 천천히 손을 들었다. 시호는 언제나 그렇듯 차갑고 단호한 표정이었고, 나오와 미나코는 불안해보이면서도 망설이는 기색은 없었다. 이번엔 약간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힐끔 쳐다보았다. 안나와 세리카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손을 가만히 둔 채 앉아 있었다. 둘 다 손을 들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바닥으로 향했다. 더 생각했다간 손을 들 타이밍을 놓칠 것이다. 뭔가 커다란 덩어리를 억지로 삼키는 기분으로,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하루카 씨는 나를 포함해 여섯 명을 꼼꼼히 둘러보고 나서 말했다.

솔직히 들어줘서 고마워. 저기, 내 생각엔-”

솔직히라는 말에 가슴 속 어딘가 한쪽이 쑤시는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손을 내리고 무릎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이상하게 생각하시진 않았을까. 가장 늦게 들었으니까…….

그 순간 우연히, 아주 우연히 안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짧은 몇 초 동안이었지만 안나의 눈빛이 마치 내 마음을 꿰뚫어보는 것 같았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숨을 들이켰다. 안나는 곧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지만, 나는 마치 잘못을 들킨 사람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누가 눈치 채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이 순간만은 다른 누구의 얼굴도 쳐다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그 때 손을 들지 말았어야 했다.

 

 

회의가 끝난 후, 다들 삼삼오오 모여 집으로 가거나 다른 스케줄을 위해 레슨실을 떠났다. 회의라고 해봤자 제대로 된 분위기에서 끝난 게 아니어서 모두 표정이 어두웠다. 안나가 카나의 메일을 하루카 씨에게 전해주었을 때나 시호가 하루카 씨에게 심한 소리를 했을 때는 정말로 더 나빠질 수 없을 만큼 나빴다. 선배들도 우리들도 확실한 결론은 내리지 못 했지만, 나는 그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만 싶었다. 밖은 어느새 어두워진데다 비가 오고 있어서 우울함은 한층 더 짙어졌다.

나는 우산을 들고 구름 낀 회색 하늘을 멍 하니 올려다보았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뭘 해야 할지 아무것도 가늠되지 않았다.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특기였는데.

유리코.”

너무나 조용한 목소리였기 때문에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안나가 우산을 쓴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약간 뒷걸음치고 말았다. 안나는 계속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기 때문에 제대로 듣기 위해 무척 집중해야 했다.

……선배들이, 우리하고 얘기해보고 싶으시대. 하지만 인원이 너무 많으니까 둘씩 나눠서 가기로 했어.”

안나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유키호 씨랑 이오리 씨네 집이 넓다고 해서, 시호랑 나오랑 미나코는 이오리 씨네, 나랑 세리카는 유키호 씨네 집에 갈 거야.”

거기까지 말한 뒤 안나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또다시 마음을 꿰뚫어보는 것처럼 생각되는 눈빛이었다.

유리코는?”

……?”

얼떨결에 대답했지만, 내가 듣기에도 바보 같았다.

유리코는 어디로 갈 거야? 무슨 뜻인지 알잖아.”

안나가 침착한 태도로 말했다. 나는 입안이 바싹 말라가는 것을 느꼈다. 또다. 하루카 씨가 모두를 모아놓고 선택하게 했던 것처럼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안나와 나, 둘 뿐이다.

……나는, 나는…….”

나는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어 침을 한 번 삼키고, 다시 입을 벌렸다. 안나는 잠자코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손을 들었다가 안나와 눈이 마주쳤던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내가 참을 새도 없이 두 눈에 눈물이 고이고 말았다.

나는모르겠어. 모르겠어. 안나, 나는.”

정말이지 바보 같았다. 눈물은 참지 못해 흘러나왔고 입은 모르겠어, 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나는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다른 한 손으로 젖은 눈가를 세게 눌렀다. 안나는 내 갑작스런 울음에도 놀라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애는 표정에 어떤 변화도 없이 천천히 날 향해 다가왔다. 나는 입을 열 때마다 신음하고 울먹거리느라 띄엄띄엄 힘겹게 말을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 나는절대로, 선배들처럼 춤 출 수 없을 거야. 시호랑 나오, 미나코만큼 따라가지도 못 할 테고……. 그치만, 그렇지만못 하겠다고 말할 순 없어. 안나도 시호가 하는 말 들었잖아? 뒤쳐지면, 버려질 거야. 카나처럼! 그런 건 싫어! 나도 모두랑 같이 무대에 서고 싶어!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목소리가 갈라져서 제대로 나오는 것 같지도 않았다. 가까이 다가온 안나는 말없이 서 있다가 내가 더 이상 말하지 않자 손을 들어 손수건을 건넸다. 나는 망설이다가 그것을 받아들고 얼굴을 닦아냈다. 할 수 만 있다면 괴롭고 창피한 기분도 같이 닦아내고 싶었다.

내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안나가 말했다.

……위선이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안나를 멍 하니 바라보았다.

유리코는 왠지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

안나는 말이지, 아이돌이 되면 현실의 나하곤 다른 캐릭터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안나가 눈을 반쯤 감은 채 말했다.

……그래, 마치 게임 속 캐릭터처럼. 그렇게 날 표현하고 싶다고. 그래서 무대에 오르면 그 스위치가 켜지는 거야. 무대 위에서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 유리코도 그렇지?”

나는 자연스럽게 안나의 말에 이끌리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책 속의 세계밖에 모르는 나에게 아이돌은 정말 눈부시게 보여서, 그런 환상적인 일에 직접 뛰어든다면 어떤 기분일까 하고…….

……환상이었던 거지, 그런 건. 현실은 더 가혹해……. 더 이상은 못 할 것 같아.”

내가 씁쓸하게 말하자, 안나는 갑자기 내 손을 잡았다. 안나의 눈은 평소의 기운 없고 졸린 듯한 기색은 없이, 마치 무대 위에서 스위치가 켜졌을 때처럼 생생하게 빛나고 있었다.

안나는, 안나가 되고 싶어하는 모습도 안나의 일부라고 생각해.”

……되고 싶어하는모습…….”

나는 안나의 말을 따라서 중얼거렸다. 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카 씨는카나를 포기하려 하진 않을 거야. 그게 가장 좋은 선택인지는 모르겠지만…….나도 이대로 카나를 버리고 가는 건 싫어. 나오랑 미나코도 기분은 다르지만 같은 생각일 거야. 시호도진심은 아니었을지도 몰라.”

안나가 너무나 단호하게 그렇게 말해서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그 애가 그렇게 한꺼번에 말을 많이 하는 것도 드문 일이었다. 어쩌면 안나도 지금은 우리 둘 뿐이라 솔직해진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대로는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선배들이랑 얘기해보고 싶어. 그럼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안나가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같이 가자, 유리코.”

하지만하지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너무뻔뻔하잖아. 나는 거짓말을 했는데할 수 없으면서 할 수 있다고, 짐이 되는 게 싫어서…….”

또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나는 황급히 손을 놓았다. 안나는 얼굴을 살짝 찡그리고 난처한 듯이 말했다.

그런 건 상관없어. 말했잖아. 자신이 바라는 모습도 자신의 일부라고그리고 지금은 유리코가 가장 편해지는 선택을 하면 되는 거야.”

그렇게 말하고 잠시 뒤 안나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안나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렇지 않아.”

내가 말했다.

그럼같이 갈 거지?”

안나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안나의 불안해 보이는 얼굴을 보자, 나도 아주 살짝 웃을 수 있었다.

……. 고마워, 안나.”

안나는 기쁜 듯이 날 마주보고 웃었다. 그리고 선배들에게 연락하겠다며 휴대폰을 가지러 갔다. 나는 안나가 사라지자마자 주저앉아서 두 눈에 남아있던 마지막 물기까지 짜내려 눈가를 세게 비볐다. 선배들하고 얘기해보면 알게 될지도 모른다, 는 안나의 말이 떠올랐다. 신기하게도 이제 나 역시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불안함도, 후회나 죄책감도 완전히 가시진 않았지만, 어쩌면……그 때 손을 들었던 나 자신을, 조금은 덜 미워하게 된 건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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