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마스] 하루마코-손
-오후부터 내린 폭설로 인해 현재 도쿄 시 대부분의 고속도로가 막혔으며, 일반 도로에서도 심한 교통 정체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오니……
프로듀서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안내방송을 듣고 초조한 듯이 운전대를 툭툭 쳤다. 그리고 뒤돌아서 직접 쳐다볼 용기는 없는 듯, 백미러로 뒷좌석에 앉아 있는 나와 하루카의 안색을 살폈다. 아니, 정확히는 나를 살피고 있었다. 촬영이 끝났을 때부터 프로듀서는 내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그건 하루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차에 타고 나서 계속 뚱한 표정으로 턱을 짚은 채 말 없이 창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밖에는 거센 눈발 말고는 볼 것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차는 거북이처럼 느려졌고 안내방송은 확인사살까지 해주었다. 굳이 날씨까지 이렇게 짜증을 돋우지 않아도, 나는 지금 상당히 저기압인 상태였다. 그 붙임성 좋은 하루카나 프로듀서가 말도 못 붙이고 있을 정도로 말이다. 차 안은 난방을 틀었는데도 바깥 날씨처럼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개인적인 기분 때문에 두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날씨가 정말 안 좋네요.”
겨우 그 한 마디에 하루카와 프로듀서는 눈에 띄게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그, 그렇네!”
“하하, 이러다 제시간에 사무소에 도착 못 하겠는걸!”
“웃을 일이 아니잖아요.”
“그, 그렇지…….”
내 말에 프로듀서는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다음 스케줄이 없어서 다행이야.”
하루카가 재빨리 말했다.
“오늘은 아까 그 토크쇼 촬영뿐이었으니까…… 아!”
하루카는 말을 하다 말고 아차 싶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나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괜찮아.”
“그, 그래도… 미안.”
하루카가 울상을 짓자 나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로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으, 응…….”
그리고 대화는 끊겼다. 차 안에는 다시 어색하고 차가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프로듀서는 괜히 라디오의 볼륨을 키우거나 채널을 바꾸는 등 어떻게든 다른 소리로 차 안을 채우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나 역시 이런 분위기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마음은 두 사람 못 지 않았지만, 지금은 억지로라도 웃을 기분이 들지 않았다. 시선을 다시 창밖으로 향하자 폭설로 온통 하얘진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보고 있자니 몸의 모든 감각이 한 시간 전 촬영 스튜디오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 때 들은 말들이 귓가에 울리고 그 때 본 웃음들이 시야를 덮었다.
-키쿠치 씨는 ‘남자같다’는 말을 많이 듣죠.
-그거 그냥 인기를 끌기 위한 컨셉 아닌가요?
-좋겠어요, 여자들한테 멋있다는 말 들으면……
-아니면 혹시 여자한테 흥미가 있어서 남자처럼 군다든가-?
그 일이 다시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도장에 있다면 몇 명이든 바닥에 엎어 치고, 목판 몇 십 개든 깨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비교적 자유로운 토크쇼라는 말은 들었지만, 생방송 촬영 중에 그런 모욕적인 말들을 면전에서 대놓고 들은 건 처음이었다. 자신도 그 방송을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었다. MC들이 초대한 게스트 연예인에게 장난스럽게 독설을 날리거나 소문거리를 들추거나 하는 식으로 웃음을 이끌어내는, 그런 가벼운 가십 위주의 방송이었다. 알고 있었는데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방송 내내 하루카가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자신의 눈치를 살피던 게 생각났지만,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촬영을 어떻게 끝냈는지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덜컹
순간 차체가 갑작스럽게 옆으로 기울어졌다. 몸이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느낌에 머릿속에 떠올랐던 불쾌한 영상은 빠르게 지워졌다. 나는 앞좌석을 붙잡고 머리를 두어 번 흔든 후, 재빨리 옆에 앉아 있는 하루카를 보며 외쳤다.
“하루카, 괜찮아?”
“으, 응. 괜찮아. 프로듀서 씨는……?”
하루카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프로듀서는 이번엔 제대로 뒤돌아본 채 큰 소리로 외쳤다.
“하루카, 마코토. 너희 둘 다 괜찮아?”
“네, 네.”
“프로듀서, 무슨 일이에요?”
“바퀴가 눈 속에 빠졌나봐. 잠깐만 보고 올게.”
프로듀서가 평소와 달리 진지하게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와 하루카는 서로를 쳐다보고 불안한 눈빛을 교환했다. 하지만 곧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조심하세요.”
“제가 도와드릴까요?”
내가 금방이라도 따라 나가려는 듯 반쯤 일어선 채 말하자, 프로듀서는 경직된 얼굴을 풀고 싱긋 웃어보였다. 그리고 내 어깨를 살짝 누르며 말했다.
“괜찮아, 마코토도 여자애니까. 하루카랑 같이 차 안에서 얌전히 기다리렴.”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 한 채 차문을 열고 나가는 프로듀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이 닫히자 그 반동으로 차체가 다시 흔들렸다. 나는 털썩 소리를 내며 뒷좌석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창문은 이제 하얗게 얼어붙어서 바깥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프로듀서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자 더욱 불안해졌다. 역시 그냥 따라 나갈걸 그랬나 싶었지만, 하루카를 차 안에 혼자 남긴 채 불안에 떨게 하는 것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프로듀서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나를 여자아이로 대해주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이럴 때까지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는 모순된 생각이 들었다. 모순이라, 정말 그렇다.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자신은 모순되어 있다. 남들이 제대로 여자아이로 봐주길 바라면서, 왕자님 이미지로 인기를 끌며 돈을 벌고 있는 것이다. 귀여운 옷이나 인형, 순정만화를 좋아하면서도, 스포츠나 싸움에서는 늘 승부욕이 들고 힘쓰는 일에는 나서고 싶었다. 멋진 남자가 이상형이면서도 여자아이가 곤란에 처한 것을 보면 가만히 내버려둘 수가 없다. 가끔은 나조차 나를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 촬영에서 MC가 그런 말을 한 것도 이해가 갔고, 자신은 그것에 화낼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허탈해졌다.
5분쯤 시간이 흘렀을까, 얼어붙은 정적을 깨고 하루카가 입을 열었다.
“마코토, 잠깐 손 내밀어봐.”
“미안, 지금 단 거 먹고 싶은 기분이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하루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빙긋 웃어보였다. 누군가 풀이 죽어 있을 때 사탕이나 캐러멜 등 달콤한 간식을 선물하는 건 하루카에게 일종의 관습 같은 거라, 이번에도 그러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뭣 때문인지 쉽게 생각나지 않았다. 뭔지 궁금하기도 했고, ‘하루카라면 장난치는 건 아니겠지’ 라는 믿음에 나는 천천히 한 쪽 손을 내밀었다. 하루카는 손바닥을 위로 한 채 펴고 있는 내 손을 잡아서 손가락 끝을 위로, 손바닥은 자신 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자기 손을 들어 내 손바닥에 갖다 댔다. 하루카의 손과 내 손이 우리 둘 사이에서 딱 마주쳤다. 나는 그것을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다 의아한 눈빛으로 하루카를 바라보았다. 하루카는 웃으면서 말했다.
“딱 맞네.”
그 말이 서로의 손 크기가 딱 맞는다는 뜻으로 이해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왜?”
“그러니까 봐.”
하루카는 그렇게 말하며 마주하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 힘이 내 손에 전해지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마코토도 여자애 손이야. 작고 부드러운, 여자애 손.”
그리고 하루카는 다시 웃어 보였다. 나는 말없이 하루카를 바라보다가, 잠시 후에야 그 애가 날 위로해주려고 그런다는 걸 깨달았다. 방법이 조금 엉뚱하긴 했지만, 그 애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이다.
나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 그러자 하루카의 웃음이 더욱 환해졌다.
“……고마워, 하루카.”
내가 말했다. 그리고 천천히 손가락을 구부려 하루카의 손과 깍지를 꼈다. 하루카도 따라서 그렇게 했다. 내가 손가락에 힘을 주거나 풀거나 하면 하루카도 그렇게 했다. 우리는 그렇게 계속 손장난을 치며 잠시 동안 실없이 웃어댔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이제 괜찮…….”
운전석 옆 차문이 벌컥 열리더니 프로듀서가 환한 얼굴로 들어오며 외쳤다. 그리고 손을 마주잡고 있는 우리 두 사람을 보자 잠시 주춤거렸다.
“아… 미안, 내가 방해했니?”
그 말에 하루카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재빠르게 손을 놓았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추우니까 빨리 문 닫아주세요!”
“아, 응…….”
프로듀서는 운전석에 바로 앉고 차문을 단단히 닫은 뒤 시동을 걸었다. 그는 다시 백미러로 내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약간 놀란 듯한 어조로 말했다.
“음… 마코토, 이제 괜찮니?”
“뭐가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프로듀서가 당황해서 말했다. 나는 피식 웃어 보였다.
“괜찮으니까, 이제 운전에 집중해 주세요.”
“으, 응.”
하루카가 옆에서 쿡쿡거리며 웃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거세게 몰아치고 있는 눈발이 조금은 따스하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