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13.
“저희 둘이서… 함께 이벤트를요?”
이른 오전의 사무실, 아직 여름이 가지 않아 무더운 날씨다. 주말이라 대부분 일을 하러 나가 조용한 사무소 안에는 약하게 틀어놓은 에어컨의 기계음만이 울리고 있었다. 치하야는 미키와 프로듀서 앞에 나란히 서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래, 이벤트 제작 회사에서 연락이 왔는데, 다음 주에 있는 모 회사의 신작 홍보 이벤트에서 공연할 수 있는 아이돌을 두 명만 보내 달라고 하더라. 이왕이면 노래도 춤도 좀 되는 아이돌로…라고 하던데, 그 때 스케줄이 비어 있는 건 치하야랑 미키 뿐이라서…….”
프로듀서가 특유의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 그런 얼굴에도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진 치하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 그 날은 스케줄 대신 보컬 레슨이 잡혀 있었다. 하지만 일이 들어온 이상 그 쪽을 우선해야 할 것이다. 크게 신경 쓰이진 않았다.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으니까.
“아, 이건 당일 공연할 곡들의 세트 리스트랑 이벤트 프로그램이야.”
프로듀서가 팸플릿을 내밀며 말했다. 치하야는 먼저 곡의 리스트를 훑어보았다. 대부분 무난히 부를 수 있는 것들이다. 물론 미키도 그럴 것이다.
“일주일이면 적은 시간은 아니지만 어쨌든 호흡이 중요한 일이니, 둘이 시간을 맞춰서 자주 연습을 해봐야 할…거야.”
프로듀서가 말끝을 흐리며 미키를 흘끔 쳐다보았다. 자연스레 치하야도 옆에 서 있는 미키를 보게 되었다. 방금 잠에서 깨어난 미키는 눈을 끔벅거리며 연신 하품을 해댔다. 머리카락은 부스스하고 옷은 주름져서 늘어난 데다 브래지어 끈이 살짝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미키는 전혀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하고 있어도 그녀는 이상하게 매력적으로 보였다. 이런 걸 백치미라고 하는 걸까. 치하야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후…, 프로듀서, 얘기 끝났어?”
“미키… 너 내 얘기 제대로 듣긴 한 거야?”
“그럼, 다음 주에 있는 어떤 이벤트에 치하야 씨랑 같이 나가서 공연하고 오란 거잖아. 알아서 할 테니까… 미키, 이제 다시 자러 갈래.”
미키는 또 다시 하품을 하더니 반쯤 뜬 눈으로 치하야를 보며 미소 지었다.
“잘 부탁해, 치하야 씨.”
“……그래.”
치하야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혼자서 팸플릿을 챙겼다. 그리고 프로듀서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자리를 벗어났다. 미키는 그 사이 벌써 소파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프로듀서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다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마음을 꿰뚫어본 듯 리츠코가 다가와서 걱정스레 말했다.
“괜찮을까요, 저 두 사람에게 맡겨도…….”
“뭐, 둘 다 개인 실력은 좋고, 미키가 저렇게 보여도 본방에서는 열심히 하니까.”
프로듀서는 리츠코가 아니라 자신을 설득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그리고 치하야는 성실하니까, 미키가 농땡이를 부려도 잡아줄 수 있을 거야.”
“글쎄요…….”
리츠코는 의심스런 눈빛으로 치하야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쉬울 것 같진 않은데요.”
프로듀서의 말대로 미키와 단둘이 일을 맡은 것은 처음이지만, 치하야는 평소에 레슨이나 일 외에도 나름대로 미키와 가깝게 지내는 편이었다. 그보다는 미키가 유독 치하야에게 살갑게 군다고 해야 할까, 하루카만큼은 아니지만-아니, 하루카와 같은 의미는 아니지만, 인가. 미키는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부터 치하야를 치하야 씨, 라며 존칭으로 불렀다. 평소에 그렇게 불리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조금 민망하기도 해서, 차라리 편하게 부르라고 했는데도 미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신도 좀 더 미키를 편하게 대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치하야는 막연히 생각했다.
하긴 그것뿐이지만.
연습실 구석에 앉아 눈을 감고 음악을 듣고 있던 치하야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미키가 문을 열고 들어오다 치하야와 딱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반갑게 인사했다.
“치하야 씨, 늦어서 미안~!”
치하야는 전혀 놀라지 않고 귀에 꽂은 이어폰을 빼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키, 내가 보낸 메일에는 다섯 시부터 연습한다고 했잖아. 지금은 다섯 시 반이야.”
“미안, 자느라 못 봤단 거야.”
미키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치하야 씨도 아까 사무소에 들렀을 때 날 깨워줬으면 좋았잖아. 코토리가 봤다고 했는데, 너무해.”
입을 쭉 내민 채 그렇게 말하는 미키를 보며 치하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키와 자신이 따로 연습을 한다고 해봤자 이렇게 되지 않을까 하고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화도 나지 않았고 더 이상 미키를 나무랄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대본과 악보를 내밀었을 뿐이다.
두 사람은 대본과 세트 곡들의 안무가 적힌 종이들을 늘어놓고 무대 위에서의 동선을 짠 후 바로 보컬, 안무 연습에 들어갔다. 이미 수없이 연습했던 곡들이지만 실제 이벤트에서 두 사람끼리 무대를 채우려면 여러 가지를 맞춰봐야 했다. 미키는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지 보컬도 안무도 막힘없이 해냈다. 과연 재능만큼은 대단하구나, 하고 치하야는 순순히 감탄했다. 부럽다거나 분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미키는 미키고, 자신은 자신일 뿐이다.
연습을 시작한 지 30분도 지나지 않아 미키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후우…. 미키, 이제 슬슬 피곤한데, 그만 가면 안 돼?”
치하야는 몸을 굽혀 흩어져 있는 종이들을 정리하며, 미키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마음대로 해.”
미키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치하야를 바라보았다. 그런 대답은 예상하지 못 한 모양이다.
“정말로? 정말로 그래도 되지? 리츠코한테도 말할 거야.”
“마음대로 해.”
치하야는 반복해서 말했다. 그리고 카세트의 버튼을 눌러 테이프를 되감기 시작했다.
“나는 남아서 좀 더 연습하다 갈 테니까, 미키 너 먼저 가.”
미키는 멍 하니 그런 치하야를 바라보다 잠시 동안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은 쭉 내민, 불만이 있는 것 같기도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미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물건을 챙기고 가방을 어깨에 맨 채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기 전에 뭔가 다시 생각하더니 치하야 쪽을 쳐다보았지만, 치하야는 벌써 다음 곡의 연습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치 미키는 이미 그 자리에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미키는 아주 잠시 더 치하야를 바라보다가 문을 열고 연습실을 나왔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두 사람은 따로 연습하는 시간을 가졌지만 언제나 같은 패턴이 이어졌다. 미키는 30분도 안 돼서 연습실을 먼저 나오고 남은 치하야는 혼자서 30분 더 연습하는 식이었다. 리츠코는 치하야보다 일찍 돌아오는 미키를 향해 매일 쓴 소리를 했지만, 바빠서 그런지 아니면 포기한 건지 나중에는 신경 쓰는 걸 그만둬버렸다. 미키는 치하야와 연습을 하고 난 뒤 사무소에 돌아오면 잠을 청하거나 과자를 먹으며 잡지를 읽거나, 그도 아니면 프로듀서를 귀찮게 굴거나 하면서 시간을 때웠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혼자서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 드문 모습을 보이곤 했다. 물론 치하야는 그런 모습을 보지 못 했다.
이벤트 당일 바로 전날, 미키는 평소와 달리 30분이 지나도 먼저 가지 않고 연습에 집중했다. 치하야는 거기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미키가 가끔씩 부리는 변덕이겠지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가장 어려운 곡의 안무 연습을 마친 뒤, 두 사람은 땀범벅이 되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치하야는 물이 담긴 페트병을 미키한테 건네고 자기도 하나 꺼내 반쯤 들이켰다. 미키는 물을 마시고 나서 숨을 몰아쉬며 치하야를 바라보았다.
“저기, 치하야 씨.”
“응?”
“내일 이벤트, 잘 할 수 있을까?”
치하야는 미키가 그런 질문을 하자 적잖이 놀랐다.
“혹시 걱정하는 거야? 미키답지 않네.”
“뭐야, 미키도 가끔 걱정 정도는 한다구.”
미키가 볼을 부풀리다 다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럴 게 미키, 연습을 많이 하지도 않았는데.”
“미키는 잘 할 거야. 본방에 강하잖아. 저번에 지방의 라이브에 갔을 때도 하루 종일 잠만 자더니, 막상 무대 위에 서니 반응만 좋던걸.”
치하야가 예전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칭찬을 받았는데도 미키는 별로 기뻐 보이지 않았다.
“그럼 치하야 씨는 그렇게 생각하니까 미키가 지금껏 계속 먼저 돌아가도 내버려둔 거야? 미키의 실력을 믿으니까?”
“음…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
치하야가 애매한 태도로 말했다. 그러자 미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응, 미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리고 무릎을 끌어 치하야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미키가 무척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치하야는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미키가 말했다.
“치하야 씨는, 미키한테 관심이 없는 거야.”
치하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 동안은 숨도 쉬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미키가 무슨 짓을 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지.”
미키의 목소리는 놀랄 만큼 덤덤하고 차분했다. 마치 연습이 끝나면 밥이나 먹으러 가자는 듯한 투였다. 하지만 치하야는 목소리나 말투에 드러나는 것만으로는 미키의 생각을 알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쥐어짜내듯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
“솔직히 미키, 좀 상처 받았어. 이런 적은 처음이거든.”
미키는 치하야의 말을 가로막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들만 빠르게 쏟아냈다.
“리츠코나 데코쨩이라면 내가 조금만 게으름을 피워도 바로 잔소리를 하고 화를 냈을 거야. 하루카나 마코토 군이라면 어떻게든 날 잘 구슬려서 연습하게 했을 테고. 다른 애들도 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적어도 미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거야. 그런데 치하야 씨는-”
미키는 잠시 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정말로 미키한테 신경을 쓰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했어. 물론 치하야 씨가 평소에 연습이나 일 외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함께 일하기로 하지 않았다면 이 정도인 줄은 몰랐을 거야.”
치하야는 이제 부정하려 들지 않았다. 미키가 말을 끝낸 듯 가만히 있자 치하야가 입을 열었다.
“……신경 써줬으면 좋겠어?”
미키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순간, 치하야는 그 눈이 무언가 터트릴까봐 신경이 오그라들었다. 하지만 미키는 울지 않았다. 하긴 누구든 이만한 일로 울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미키는 이제는 그 감정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치하야 씨는 정말, 너무하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치하야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괜스레 미키가 그런 얘기를 꺼낸 게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태로는 내일 이벤트를 망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이런 상황에서도 일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야말로 미키를 상처 입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치하야는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신경 쓰지 않는 것에 억지로 신경을 쓰고, 관심 없는 것에 관심을 가지라는 건 무리다. 나한테는 특히나 더.
그렇다 해도, 미키한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치하야는 일단 위로라도 될까 싶어(그럴 리는 없겠지만) 손을 뻗어 고개를 숙인 미키의 어깨 위에 얹었다. 그러나 미키는 치하야의 손이 닿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치하야는 약간 놀란 채 미키를 올려다보았다. 아까와 같은 상처받은 표정은 없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눈가가 약간 붉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말, 너무하다니까. 치하야 씨는!”
그렇게 말했지만, 미키는 웃고 있었다. 목소리도 평소처럼 당당했다. 치하야는 겸연쩍은 투로 미키를 불렀다.
“미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뭐. 미키는 치하야 씨를 존경하니까.”
미키가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었다.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고 다른 한 손은 치하야에게 내밀었다.
“……내가 존경하는 치하야 씨랑 처음으로 같이 하는 일인걸. 그러니까 내일 있을 이벤트는, 반드시 성공시킬 거야. 자, 미키도 치하야 씨도 만족할 수 있을 만큼 더 연습하자!”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미키는 기운을 차린 것 같았다. 정말 점점 더 속을 모를 애라고 치하야는 생각했다. 갑자기 혼자 상처 받더니 갑자기 혼자 기운 차리는군. 하지만 그것도 어떻게 보면 미키다운 건지도 몰랐다. 치하야도 걱정을 한시름 덜게 되자 미소를 지으며 미키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났다.
“좋아, 오늘은 먼저 돌아가는 것도 봐주지 않을 테니까.”
“치하야 씨야말로 나보다 더 연습할 필요 없도록 해.”
미키가 지지 않겠다는 듯 대꾸했다. 두 사람은 마주보더니 웃었다.
치하야는 곡을 처음부터 되돌리기 위해 카세트 쪽으로 걸어갔다. 미키는 그런 치하야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에게 들리지 않게끔 중얼거렸다.
“……정말 너무한다니까, 치하야 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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