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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아즈리츠 AU-운명의 사람

치하미키 AU와 같은 세계관, 설정입니다.

리츠코가 주인공. 커플링은 아마 아즈리츠...

1만...7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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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츠코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그 마을에서 사람들의 왕래가 가장 잦은 시장터의 활기찬 거리였다. 해마다 마을 축제는 그 거리를 중심으로 열렸으며 아무리 작고 흔한 소문이라도 그 곳을 중심으로 퍼졌다. 낮에는 장을 보러 온 여인들과 뛰어노는 아이들로 항상 시끄러웠는데, 밤이 되면 술과 유흥거리를 찾는 남자들로 더욱 시끄러웠다.

그 거리에서 조금만 뒷골목으로 들어가면 바로 유곽이 모여 있는 거리가 나왔다. 리츠코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 거리를 제 집 정원마냥 드나들었다. 그 거리의 의미를 알게 된 게 언제였는지, 이제는 기억하지 못 했다. 다만 리츠코가 그 거리를 처음으로 인식한 것은 노랫소리에 의해서였다. 부모가 장사 일로 바빠 낮에 그녀를 제대로 돌보지 못 할 때, 어린 리츠코는 사촌 동생의 손을 잡고 유곽 쪽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홀린 듯이 그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그렇게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노래를 알게 되었다. 밤이 되면 유곽들마다 불이 켜졌고 화려한 머리 장식과 기모노로 치장한 유녀들이 거리에 나왔다. 그녀들의 달콤한 목소리, 분 냄새, 반짝이는 머리 장식 등이 어린 리츠코의 눈에 단단히 각인되었다. 리츠코는 그 반짝임에 순식간에 빠져들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잡으려고 거리를 돌아다니곤 했다. 가게의 유녀들은 그런 리츠코를 귀여워하며 노래와 춤을 가르쳐 주기도 하고 간식이나 인형 등을 건네주기도 했다. 리츠코는 그런 것을 그냥 받으려 하지 않았고 이 가게 저 가게를 돌아다니며 잔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못 쓰게 된 물건을 보면 허락을 받고 가져가 장에서 싼값으로 내다 팔았다. 그녀는 자연스레 장사 수완을 익혔고 돈 계산에도 웬만한 장사꾼보다 밝아졌다.

조금 더 나이를 먹은 뒤에 그 반짝임 너머로 무엇이 오가는지 알게 된 리츠코는 오히려 더욱 거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는 직접 옛 유녀들에 대한 기록이 담긴 자료나 책을 찾아다녔고 과거부터 현재까지 유곽 문화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자세히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유곽 거리를 돌아다니며 잡일을 하고 조금씩 돈을 모았다. 학교를 일찍 졸업하고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리츠코는 자신의 삶에 한 가지 목표를 가지게 되었다.

언젠가 이 거리에 나의 가게를 가지고 싶어.’

리츠코는 거리를 둘러보며 생각했다.

나만의 가게, 나만의 유녀들을.’

 

 

그런 리츠코의 삶이 전환점을 갖게 된 것은 어느 한가로운 여름날 오후, 저잣거리 주점에서 벌어진 말싸움에 의해서였다.

……그러니까 제 말은, 지금의 유곽 문화는 잘못되었단 거예요.”

리츠코가 말했다. 주점 안을 채우고 있는 남자들은 리츠코가 어릴 때부터 시장 거리에서 봐온 얼굴들도 있었고 아닌 이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리츠코를 무시한 채 계속 술잔을 기울였고 어떤 사람들은 재미있다는 듯 리츠코를 바라보았다. 공통적으로는, 꽤나 자주 일어나는 일인 것처럼 다들 익숙해 보였다.

또 시작이구나, 리츠코.”

제 말이 옳다는 걸 증명해보일 수 있어요.”

리츠코는 단호한 목소리로 가게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모두 그녀보다 덩치 크고 나이 많은 남자들뿐이었지만 리츠코의 태도가 어찌나 당당하고 눈빛이 매서운지 오히려 기가 죽는 남자들도 있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창녀니, 매춘부니 하는 말로 유녀들을 모욕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원래 유녀는 몸을 파는 게 1차적인 직업이 아니에요. 고대 때부터 있었던 성스러운 일이라구요.”

누군가 크게 콧방귀를 뀌는 소리가 들렸다.

창녀가 성스럽다니, 별 소리를 다 들어보겠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니까요!”

리츠코는 성난 얼굴로 열변을 토하듯 말했다.

원래 유녀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위로해주기 위해 노래하고 춤추는 여자들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몸을 파는 일로 본말이 전도돼서는, 세상 사람들이 다 유녀들을 업신여기고 유녀들도 스스로를 하찮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제는 노래와 춤 솜씨가 훌륭한 유녀는 거의 없고, 그저 몸을 파는 직업이라고 세간에 인식이 되어 있으니- 이건 잘못된 거예요, 바꿔야 한다구요!”

리츠코가 말을 끝내자 주점 안은 잠시 조용해졌다가, 곧 다시 제각각 하고 싶은 얘기를 하며 소란스러워졌다.

리츠코, 우린 다 널 좋아하지만, 넌 어릴 때부터 잔소리가 너무 심했어.”

그래, 괜히 도깨비 중사라고 별명이 붙은 게 아니라니까.”

노래나 춤을 보려면 극장에 가면 되지, 왜 유곽엘 가겠어?”

이봐요-”

화가 나서 다시 목소리를 높이려는 리츠코의 어깨를 누군가 붙잡았다. 돌아보니 가게 주인이 무뚝뚝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츠코, 가게 일을 도와주러 온 건 고맙지만 손님들 술맛 떨어지는 얘기를 할 거면 나가렴.”

도와주러 온 게 아니라 일을 하러 온 거죠. 난 돈을 받으니까요.”

리츠코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당돌하게 말했다.

그리고 애초에 술을 마시면서 유녀들을 모욕하는 얘기를 꺼내게 하지 말았어야죠. 저도 더 이상 여기 있고 싶지 않네요.”

그렇게 말하고 리츠코는 주점 안을 잠시 경멸에 찬 시선으로 노려본 뒤, 가게 입구의 포렴을 걷고 밖으로 나왔다. 곧 있으면 어두워질 시간이었지만 리츠코는 집 쪽으로 향하지 않고 유곽 거리로 향하는 뒷골목으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화가 났다. 왜 아무도 자신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는 걸까? -

아가씨, 잠깐만.”

누군가 빠른 걸음으로 리츠코를 쫓아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리츠코가 뒤를 돌아보자 조금 전 가게 안에서 본 중년 남성이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리츠코는 마을 안에서 모르는 얼굴이 거의 없었지만 그는 확실히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조금 경계하는 눈빛으로 남자를 훑어보며 말했다.

왜 그러시죠?”

내가 아까 술집 안에서 아가씨 얘기를 들었는데 말이야, 꽤나 흥미롭더군.”

아아, 그러세요, 하고 리츠코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붙잡힌 팔을 빼내려고 했다. 남자는 손을 놓더니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은데 말이야. 그래서 아가씨는 앞으로 어떻게 할 셈이지? 현재의 유곽 문화를 바꾸고 싶다면 무슨 방도라도 생각해두고 있는 건가, 아니면?”

그 말에 리츠코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누구도 그녀에게 그런 질문을 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리츠코는 머뭇거리다가 재빨리 말을 시작했다.

그야생각해두고 있는 거야, 많죠. 일단은 유녀들을 가르치는 전문 학교가 있어야 해요. 전문 훈련사들을 고용하고, 노래와 춤을 가르치고…… 몸을 파는 것뿐인 하급 유곽들의 관리를 좀 더 철저히 해서-”

허황된 얘기로군.”

남자의 칼 같은 말에 리츠코는 금방 기분이 나빠졌다. 그녀는 얼굴을 구기고 남자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나는, 나는 돈을 모으고 있어요. 언젠가 내 가게를 가질 거야, 내 이상적인 유곽을. 그러기 위해 계속 저 거리에서 일하는 거고요. 당신하곤 상관없는 일이죠.”

리츠코는 쏘아붙이듯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러나 남자가 그녀를 다시 붙잡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 아까도 말했다시피 난 아가씨 생각이 흥미롭다고 생각하니까.”

혼잡한 시장 길목의 한복판이었지만 주위 사람들은 저마다의 일로 바빠 그들 두 사람을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남자는 허리를 숙이고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말했다. 덩달아 리츠코도 조금 긴장하며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은 말이지, 내가 저 거리에 작은 유곽 여러 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네. 아가씨만 괜찮다면 그 가게 중 하나를 맡아 관리하도록 고용해줄 수 있어.”

리츠코는 그 말을 듣자마자 두 발이 땅에 붙은 듯 잠시 동안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나자, 그녀의 머릿속이 정신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녀에겐 무척이나 솔깃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우선은 의심이 들었다. 그것은 리츠코가 살아오는 동안 배운 것 중 가장 유용한 것이었다. 그녀는 입을 열어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왜죠?”

나도 어느 정도는 아가씨 의견에 동의하니까.”

됐어요, 나는 내 돈으로 가게를 차릴 거니까. 남의 도움 따위는-”

일단은 경험을 쌓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거저 받으라는 게 아니야, 잠시 빌려준다는 거지.”

남자는 빚지는 것을 싫어하는 리츠코의 성격을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리츠코의 이성은 줄다리기를 하는 듯 당겨졌다 끌려가기를 반복했다. 말싸움으로는 져본 적이 거의 없는데, 저도 모르게 남자의 말에 설득되고 있었다.

……다른 조건은?”

마침내 리츠코가 말했다. 남자는 감탄한 듯 보였다.

정말 똑똑한 아가씨군.”

대답이나 하세요.”

가게를 빌려주는 건 3, 그 안에 무슨 성과를 올리라거나 그런 말은 안 해. 3년 동안 착실히 번 수익을 기록해 매달 제출할 것. 분배는 내가 할 테니까. 다른 가게의 수익보다 높으면 아가씨와 그 가게 유녀들에게 돌아갈 돈도 늘어나는 거고. 그 동안 사고만 일으키지 않으면 돼. 유녀들 관리도 맡기겠어. 그 쪽에 자신이 있어 보이니, 아 그리고 하나 더-”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리츠코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런 것은 틀린 적이 거의 없었다.

가게를 관리하기 전에 우선 1년 동안 직접 유녀 일을 해볼 것.”

뭐라고요?”

리츠코가 크게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들을 흘긋거렸다. 남자는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였지만 리츠코는 얼굴이 확 붉어진 채 입을 벙긋거렸다.

그게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인데.”

어이가 없군요, 됐어요. 나는 유곽을 관리하고 싶은 거지 유녀가 되고 싶은 게 아니니까-”

어째서? 부끄러운가? 역시 자네도 속으로는 유녀라는 직업을 업신여기고 있는 건가.”

남자가 빈정거리자 리츠코는 발끈했다.

그런 게 아니에요! 난 그저-”

진심으로 현재의 유곽 문화를 바꾸고 싶다면, 일단은 현장에서 그녀들의 기분도 느껴봐야 하지 않을까.”

…….”

리츠코는 홀린 듯 남자의 말을 듣고 있었다. 사실, 그녀도 그런 생각을 아예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누구한테도 말한 적 없었지만, 그녀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에도 보통 사람보다 꽤 자신이 있었다. 물론 유녀가 그 일만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 그래도 못 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자리를 뜨려고 했다. 리츠코는 그가 무척이나 얄밉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엔 저런 태도로 거래를 성사시키려는 것이다. 그녀가 자주 써온 수법이기도 했다.

……하겠어요.”

리츠코가 말했다. 남자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럼 거래는 성사된 것으로, 가게 위치는 조만간 사람을 시켜 알려주겠네.”

리츠코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힘내보게, 정말로 뭔가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설마 리츠코가 정말로 이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

임시예요, 임시.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리츠코가 쌓여진 수건들을 개키며 말했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던 나이 많은 유녀가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지다가, 리츠코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싱긋 웃었다.

그래도 리츠코, 꽤 즐거워 보이는걸.”

그야, 관리 일도 동시에 하고 있으니까 그렇죠. 이것도 임시긴 하지만…….”

리츠코는 회심에 찬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이걸로 제 꿈에 가까워졌다는 거예요. 사실 정식으로 일하는 건 좀 더 큰 유곽이었으면 했지만.”

어머나, 너무한걸.”

리츠코는 말을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곧 가게 문을 열 시간이다.

주점에서 만난 남자가 가르쳐준 가게는 유곽 거리 한복판에 위치해 있었다. 숲과 수로와도 가까웠고, 2층집이었으며 가게 안에는 작은 정원까지 있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아담하고 깔끔해 자주 가지 않아도 정겨운 느낌이 들었다. 리츠코는 남자와 약속한 대로 그 곳에서 3개월 임시로 유녀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리츠코는 관리 일도 동시에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남자는 그것까지 말리진 않았다. 이 정도면 꽤 성공적인 거래라고 리츠코는 생각했다. 완전히 자신의 가게는 아니지만, 일단 가게를 직접 관리할 수 있는 경험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걸 위해서라면 1년 정도 유녀 일을 하는 것쯤이야 참을 수 있었다.

어디 보자, 오늘 연회에 참석할 애들은…….”

리츠코가 장부를 뒤적이는 사이, 2층에서 누군가 느린 발걸음으로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리츠코가 고개를 들자 긴 금발머리를 한 소녀가 졸린 얼굴을 하고 계단 난간에 기대어 있는 것이 보였다.

……아후. 안녕, 리츠코.”

미키!”

리츠코는 호통 치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옷차림이 그게 뭐니? 이제 곧 연회 시작인데 아직도 준비를 안 하고 있었던 거야?”

우웅, 미안하다는 거야, 리츠코…….”

“‘을 붙여야지!”

리츠코는 이미 몇 번이나 말했던 잔소리를 미키를 향해 늘어놓기 시작했다. 미키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 근방 가장 유명한 아이였으므로 이 가게에 들어오기 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다. 처음 미키의 공연을 봤을 때는 대단하다고만 생각했지만, 막상 자신이 그녀를 관리하는 입장이 되니 그렇게 짜증이 날 수가 없었다. 미키는 리츠코의 잔소리에 익숙해졌는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연신 하품을 해대다, 리츠코가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 그런데 리츠코, 미키의 부채가 없어졌어.”

?”

리츠코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어쩌다가그건 춤을 출 때 필요한 거잖아! 넌 네 물건 하나도 제대로 관리 못 하니? 잃어버리기나 하고!”

잃어버린 거 아니다 뭐, 저절로 없어졌다는 거야.”

미키는 볼을 부풀리며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 때 그들 옆에 있던 방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그저께 아미랑 마미가 그걸 가지고 노는 걸 봤는데.”

그 녀석들이?”

리츠코는 홱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혹시 어디 있는지 알아요?”

아까 오다가 역 근처에서 본 것 같아요.”

리츠코는 그 말을 듣기 무섭게 외출복을 걸쳤다.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가기 전에 뒤를 돌아보고 미키를 향해 한 마디 쏘아붙였다.

금방 갖다올 테니까 내가 오기 전까지 제대로 준비해놔!”

미키는 느긋한 미소를 지은 채 손을 흔들어 보였다. 리츠코는 어쩐지 분하다는 생각을 하며 역을 향해 뛰다시피 걷기 시작했다.

아미와 마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시장과 유곽 거리를 오가며 자란 아이들이었다. 그 애들 역시 어린 시절의 리츠코처럼 잔심부름을 하며 어른들에게 귀여움을 받았는데, 리츠코와 다른 점이라면 더 장난이 심하고, 더 약았다는 것이었다. 리츠코는 아미와 마미를 만나면 늘어놓을 잔소리도 거의 외우다시피 하고 있었다.

역 앞은 때마침 사람들이 가장 붐빌 시간이었다.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사방을 정신없이 살피며 쌍둥이를 찾아다녔다. 서두르지 않으면 연회 준비에 늦고 말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다녀 봐도 아미와 마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넓은 곳도 아닌데, 그새 다른 곳으로 가버린 걸까. 리츠코는 그 생각이 들자마자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그녀는 역 앞을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틈에 부딪히면서 잠시 동안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머나?”

그 소리가 들렸을 때, 리츠코는 놓았던 의식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탐스럽게 긴 흑발을 허리 아래까지 늘어뜨린 젊은 여성이 지도 같은 것을 들고, 척 봐도 길을 잃은 듯이 곤란한 얼굴로 헤매고 있었다. 그녀는 길을 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뭔가 물어보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다들 바쁜 듯이 그녀를 무시하고 지나쳐 갔다.

어머나…… 저기요- 실례합니다…….”

리츠코는 정신을 차린 후에도 몇 분 정도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마음속에 뭔가가 꿈틀대며 고개를 들었는데, 그것은 타고난 성실함과 틀어진 것을 보면 바로잡고 싶어 하는 본능이었다.

리츠코는 그 여성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기요.”

?”

여성은 뒤돌아서 리츠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자치고는 키가 큰 편이었는데 리츠코와 한 뼘 정도 차이가 났다. 리츠코는 누군가의 겉모습만 보고 압도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뒤돌아선 그녀를 정면으로 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이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여자는 굉장히 아름다웠다. 아니, 아름다움을 넘어서 그녀의 표정과 거동에서는 보통 사람들에게서 보기 힘든 품위가 조용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빛은 굉장히 평온했고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리츠코는 그녀가 입고 있는 기모노가 얼마나 고급인 것인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분명히 귀한 집 아가씨일 것이다. 당당히 말을 걸긴 했지만, 리츠코는 무의식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저기무슨 일이신가요?”

여자가 묻자 그제야 리츠코는 정신을 차리고 쭈뼛거리며 말을 꺼냈다.

…… 그 쪽이야말로, 곤란해 보이는데요. 길을 잃으신 것 아닌가요?”

어머나, 어떻게 아셨어요-?”

그야 척 보면 안다구요, 하고 리츠코는 중얼거렸다. 막상 말문이 트이자 마치 시장에서 손님을 상대하듯 편하게 말을 할 수 있었다. 여자의 말은 끝이 약간 늘어지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요, 사실은 역 앞 찻집에서 어떤 분을 만나기로 했는데…… 어딘지 찾기 어려워서 곤란해 하고 있었답니다.”

여자는 한 손을 뺨에 가져가 대며 멋쩍게 웃었다. 리츠코는 한숨을 쉬며 지도를 달라고 한 뒤 펼쳐 보였다. 그녀는 지도를 보자마자 눈썹을 찡그렸다.

……만나기로 하신 곳은 여기가 아니라, 반대쪽 출구로 가셔야 할 것 같은데요.”

어머나, 그런 건가요-?”

지도를 제대로 보지도 않으시면서 왜 들고 다니시는 건가요…….”

리츠코는 그녀에게 지도를 돌려주었다. 여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워낙 길눈이 어두워서, 자주 이런 실수를 한답니다.”

…….”

어쩌면 세상의 미인이란 다들 안타까운 점 한두 가지 씩은 있을지도 모른다고, 리츠코는 미키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아무튼, 저 쪽으로 나가시면 돼요.”

네에, 감사합니다-”

여자는 허리를 숙이고 인사하더니 흘러내린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리츠코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맑은 눈빛을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성숙한 몸매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어려 보이는 인상을 주었다. 리츠코는 여자의 시선이 똑바로 다가오자 자기도 모르게 아주 약간 뒷걸음질 쳤다.

저기- 제 이름은 미우라 아즈사라고 한답니다.”

여자는 한 손을 가슴 위에 올리고 다소곳하게 말했다.

그 쪽 분의 성함은……?”

……아키즈키 리츠코예요.”

리츠코는 주저하다 대답했다.

리츠코…… 리츠코 상, 이시군요.”

여자는 곧바로 이름으로 불러오자 리츠코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리츠코 상. 다음에 또 뵈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환히 웃더니, 리츠코가 두어 번 눈을 깜박이자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이 무섭게 그들은 곧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이른 저녁 시내의 광장에서였다. 시계탑 아래에서 난처한 얼굴로 서성이고 있던 아즈사를 리츠코는 멀리서부터 발견해냈다.

……아즈사 상?”

어머나, 그러니까- 리츠코 상?”

여기서 뭐 하고 계신 건가요?”

리츠코는 짐작이 갔으면서도 그렇게 물었다. 아즈사는 버릇인지 또다시 한쪽 손을 뺨에 갖다 대고 웃었다.

그게, 사람을 만나기로 했는데, 그만 또 길을 잃어버려서 말이죠-”

그 다음은 시장터에서, 그 다음은 대학교 앞에서, 그들은 거의 일 주일에 두 번 이상은 우연히 마주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즈사는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고, 리츠코의 도움을 받은 다음 헤어졌다. 그런 일이 다섯 번쯤 되풀이되자 그 뒤부터 둘은 아예 따로 만나게 되었다. 찻집에서 만나면 함께 차를 마시기도 하고, 서점에서 만나면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 몇 시간씩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리츠코는 어째서 저렇게 대책이 없는 아가씨를 고용인도 없이 밖에 내보내는지 그 집안 사정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정말 신기하네요, 리츠코 상.”

아즈사가 경단을 하나 입에 넣으며 말했다. 이 날도 두 사람은 찻집 앞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어째서 항상 리츠코 상이 길을 잃은 저를 발견해주는 걸까요?”

그보다는 어째서 항상 길을 잃어버리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시는 게 어때요?”

리츠코가 딱딱한 말투로 그렇게 말해도 아즈사는 아무렇지 않게 웃어버렸다.

하지만 우연치곤 정말 신기한걸요. 이건 마치…….”

그녀는 말하다 말고 어딘가 먼 곳에 시선을 둔 채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그 눈빛이 어쩐지 무척 진지해 보여서, 리츠코는 약간 긴장한 채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마치, 운명 같지 않나요?”

리츠코는 맥이 탁 풀렸다.

운명이라니, 그런 걸 정말로 믿으신단 말인가요?”

네에, 물론이죠. 사실은-”

아즈사는 리츠코를 향해 얼굴을 가까이 하고 말했다.

리츠코 상에게만 특별히 말해드리는 거지만, 저는 제 운명의 상대를 찾고 있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매번 제가 누구와 약속을 잡는 건지 궁금하지 않으셨나요?”

리츠코는 어쩐지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뜨끔했다. 그녀는 모른 척 되물었다.

누구와 잡으셨던 건데요?”

맞선이에요. 이 나이쯤 되면 집에서 시집을 가라고 성화죠. 벌써 몇 달 전부터-”

아즈사는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한숨을 쉬듯 숨을 내쉬었다.

부모님께서는 제 맞선 상대를 고르느라 바쁘시답니다.”

그런 거였군요.”

리츠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유복한 집안이라면 좋은 혼담을 잡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할 테니까. 그런데도 아즈사의 입에서 맞선이란 단어가 나온 순간 그녀는 어쩐지 뭔가가 턱 하고 목에 걸린 듯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말이죠, 진정한 운명의 상대라면 맞선으로 만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찾아나서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아즈사가 그렇게 말하며 갑자기 리츠코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리츠코는 조금 놀라서 바로 대답하지 못 했다.

……, 글쎄요. 그런 얘기는 들어보지 못 한 것 같은데요.”

저는 그러고 싶어요. 상대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말이에요.”

그 말을 듣자 리츠코는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아즈사를 향해 소리치듯 물었다.

그럼 설마, 진짜로 길을 잃은 게 아니라 일부러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고 계셨던 건가요?”

어머나, 그렇지는 않답니다.”

아즈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길눈이 어두운 건 사실이에요, 결과적으로 그렇게 돼버렸지만요.”

리츠코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쩐지 속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아 애꿎은 찻잔을 꽉 쥐었다.

……그럼, 아즈사 상은 어떻게 하실 생각인데요? 계속 그렇게 피하기만 하실 순 없을 텐데요. 그런다고 운명의 상대를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열심히 돌아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나타나주지 않을까요-?”

아즈사가 느긋한 말투로 말했다. 리츠코는 자기도 모르게 다시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아즈사도 리츠코를 마주보았고,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걸 위해서라면 몇 번이나 길을 잃어버린다 해도 상관없어요.”

리츠코는 그 순간,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는 감각을 느꼈다. 실내이니 그럴 리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마음속으로, 머릿속으로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그리고 리츠코 상도 절 도와줄 거고요.”

아즈사가 말했다. 리츠코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땋아 내린 머리가 조금 흔들렸다. 아즈사는 문득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리츠코를 올려다보았다.

……리츠코 상?”

……죄송하지만, 저는 당신의 나침반이 아니에요.”

리츠코는 내뱉듯이 그 말만을 한 뒤, 자기 몫을 계산하고 찻집을 나왔다. 뒤에서 아즈사가 몇 번인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리츠코는 달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조금만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도 아즈사는 자신을 찾지 못할 터였다. 그런데도 리츠코는 한참을 달렸다. 시장이, 유곽이 보일 때까지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리츠코, 왠지 요즘 좀 이상하다는 거야.”

미키가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한 손에 턱을 괸 채 창가에 앉아 있던 리츠코는 자신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는 미키를 흘긋 바라보았다.

뭐가?”

지금 이러는 거. 아무 일도 안 하고 멍하니 시간을 때우다니, 리츠코답지 않다는 거야.”

미키 넌 언제나 그러잖아.”

미키는 미키니까. 리츠코는 리츠코고. 그리고 미키가 벌써 리츠코라고 세 번 불렀는데도 화를 내지 않잖아.”

리츠코는 대답 대신 다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때, 찻집에서 뛰쳐나온 뒤로 아즈사는 며칠째 만나지 못 하고 있었다. 사실 만나고 싶은 건지 피하고 싶은 건지 리츠코 자신도 정확한 감정을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밖에 멀리 나갈 일이 있으면 심부름을 시켰고, 유곽 안에서 혼자 생각에 잠겨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미키뿐만 아니라 다들 그런 리츠코의 이상한 변화를 눈치 챘지만, 오직 리츠코만이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밖에 나갔다 오래 들어오지 않는 일도 많아진 것 같았는데, 요즘은 또 갑자기 전혀 안 나가려 하고.”

미키는 그렇게 말한 뒤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혹시, 밖에서 애인이라도 생긴 거 아냐?”

그런 농담은 하지 마. 재미없으니까.” 

리츠코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애인이라니, 자신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일단 유녀니까 그런 게 있어서도 안 되지만. 그 전에도 누군가와 진지하게 연애를, 사랑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목표만이 보였고, 그것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만이 삶의 전부인 것 같았다.

운명의 사람을 찾고 있어요.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왜 끌렸던 것일까. 리츠코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 아무튼 알았어. 그런데 리츠코가 계속 이대로라면 다들 곤란해 할 거란 거야. 미키까지 일을 해야 할 판이라구.”

넌 제발 일 좀 해!”

리츠코가 화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미키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문 밖에서 종을 울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 쪽으로 몸을 향했다.

아핫, 손님이 왔나 보네. 그럼 미키가 나갈게-”

미키는 그렇게 말하고 현관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리츠코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사실 미키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이러는 것은 자신답지 않았다. 이렇게 대충 일하고 있다는 게 가게 주인의 귀에 들어가면 일을 그만두라고 할지도 몰랐다. 그럼 간신히 가까워진 목표에서 또 다시 멀어지는 것이다. 슬슬 정신 차려야지, 리츠코는 그렇게 다짐하고 미키를 따라 가게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몇 발자국 안 가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리츠코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저어, 여기가 리츠코 상이 일하시는 곳인가요?”

말도 안 돼, 어째서, 여기에.

리츠코는 아즈사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제대로 생각을 할 수조차 없었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다 미키의 말 한 마디를 듣고 쏜살같이 문 밖으로 달려갔다.

, 왜냐하면 리츠코는 유녀니까.”

……!”

문을 열자마자 거짓말처럼 아즈사와 딱 눈이 마주쳤다. 꽤 오랜만에 보는 거였지만, 그녀는 늘 보아온 모습과 똑같았다. 탐스러운 긴 머리, 우아한 기모노, 평온한 분위기…… 다만 표정은 평소와 달리 조금 놀라움에 차 있었다. 아즈사는 리츠코를 보자 입을 벌렸다.

리츠코…… ?”

어떻게…… 어떻게 여기에 오신 거예요?”

리츠코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첫 마디를 꺼냈다. 미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리츠코와 아즈사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시장에서부터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다들 리츠코 상에 대해 잘 알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아즈사는 뺨에 손을 갖다 대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리츠코에게는 정말 반갑지 않은 웃음이었다.

……그런데, 리츠코 상은…… 유녀셨던 거군요.”

리츠코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 살을 세게 파고드는 아픔이 느껴졌다. 언젠가는 말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알려지는 것은 더더욱 원하지 않았다. 얼굴이 온몸의 피가 몰린 듯 화끈거렸다. 그녀는 차마 아즈사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어쩐지 그래서…….”

자네도 사실은 유녀 일을 업신여기고 있는 거 아닌가.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사람에게만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자신과 사는 세계가 전혀 다른, 순수한 에너지로 가득 찬 이 사람에게만은. 우아하고, 품위 있고, 운명이란 걸 믿고 있는, 그래서 눈부시게 빛나는-

어쩐지 그래서, 리츠코 상이 그렇게 눈부셔 보였나 봐요.”

그 말을 듣자 리츠코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즈사는 한 치의 티도 없는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무슨 말을 꺼내야 좋을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리츠코가 그렇게 가만히 서 있자 아즈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저, 리츠코 상의 말을 듣고 조금 생각이 바뀌어서, 지난주에 처음으로 제대로 맞선 장소에 나갔어요. 상대는 좋으신 분이더군요.”

어째서 아즈사가 지금 그런 말을 꺼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일이 잘 되면, 조만간 정말로 결혼하게 될 지도 몰라요. 리츠코 상에게는 제대로 알려드리고 싶어서, 그래서…….”

어째서죠.”

마침내 리츠코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 같았다.

, 왜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하셨잖아요? 그런 건 아즈사 상답지 않아요. 그러지 마세요, 그러지-”

목소리가 떨렸다. 아즈사는 놀랍도록 평온해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거야…….”

아니, 울면 안 돼. 리츠코는 눈물을 참으려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금붕어처럼 입이 뻐끔거렸다.

제가…… 당신을…… 제가…….”

리츠코 상.”

어느새 리츠코에게 가까이 다가온 아즈사가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그러자 리츠코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아즈사는 너무나도 맑고 깨끗한 눈으로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운명의 상대를 찾기 위해서라면, 몇 번이나 길을 잃어버린다 해도 상관없다고- 제가 말했었죠?”

…….”

리츠코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즈사는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 것처럼 웃었다.

이제야, 겨우 찾았네요.”

그녀의 눈에 반짝이는 이슬 같은 것이 맺히는 걸 본 순간, 리츠코 역시 생각했다.

아아, 겨우 찾았어.

 

 

3년 후 겨울, 십이월의 찬바람이 황폐해진 거리를 매섭게 덮쳤다. 대부분의 유곽이 문을 닫은 그 곳은 더 이상 전처럼 활기차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리츠코는 변해버린 거리와 텅 비어버린 가게를 보며 허무하게 예전의 추억들을 떠올려보곤 했다.

그녀가 가게 주인 남자와 처음 했던 계약의 3년이 끝난 뒤에도, 리츠코는 정식으로 고용을 받은 뒤 관리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남자는 1년쯤 전인가 리츠코에게 아예 가게 소유권을 넘겨버린 후 외국으로 가버렸다. 하지만 그 가게가 더 이상 유곽으로 존재하지 않게 됐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매일매일 가게 앞을 비로 쓸었고 정원을 관리하고 청소를 하는 등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누군가 그런 리츠코를 보며 저 애는 아마 일을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이따금 리츠코는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혼자 가만히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춰보곤 했다. 너무 오랫동안 하지 않으면 잊어버릴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봐주는 사람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깝게 지내던 거리 여자들이 가끔 가게에 와서 소식을 가르쳐주었다. 누구는 어느 가게로 옮겼다더라, 누구는 단골손님을 따라갔다더라, 누구는 아예 다른 일을 시작 했다더라 등등…… 리츠코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안심이 되었다.

오랜만에 해가 밝게 빛나는, 춥지만 화창한 날이었다. 리츠코는 매일 하던 대로 빗자루를 들고 가게 앞마당으로 나갔다. 흙먼지를 쓸면서 오늘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우선 오래된 벽장 안을 정리하고, 장을 보고, 오후엔 맡겨놓은 옷을 찾으러 가고……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땅 위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졌다. 리츠코는 빗질을 멈추고 숙였던 허리를 들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찾아온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런 예감은 거의 틀린 적이 없었다.

오랜만이네요, 리츠코 상.”

리츠코가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자 아즈사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래도 리츠코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다가, 몇 분 정도 침묵이 흐르고 나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거의 1년 만에 다시 만난 아즈사는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 때 그녀는 집에서 끊임없이 권하는 맞선 이야기를 피하기 위해 도시로 일자리를 구하러 간다며 떠났었다. 다시 돌아오면 리츠코를 가장 먼저 만나러 오겠다는 약속만 하고서. 리츠코는 길을 안 잃어버리게 조심하라는 말만 했을 뿐이다.

아즈사의 길고 탐스럽던 머리칼이 뭉텅 잘려나간 걸 보고 리츠코는 조금 놀랐다. 그러나 마치 원래 단발이었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그걸 빼고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리츠코는 그런 아즈사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는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렇게 한결같을 것 같았다.

……용케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찾아오셨네요.”

어머나- 너무해요. 사실 좀 헤매긴 했지만…….”

아즈사가 웃으며 말했다. 리츠코는 빗자루를 문가에 세워 두고 팔짱을 낀 채 아즈사를 바라보았다.

머리, 자르신 건가요?”

네에, 도시에서는 요즘 이게 유행이라고 하더군요. 전보다 좀 더 어려 보이지 않나요?”

아즈사가 어깨 위에서 찰랑이는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흔들며 말했다.

리츠코 상도, 머리 모양을 바꾸셨네요? 그러니까 좀 더 성숙해 보여요.”

리츠코는 그 말에 살짝 얼굴을 붉혔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올려 묶기 시작한 것은 가게를 정식으로 관리하게 되고 나서부터였다. 나이가 어리다고 우습게 보는 손님들이 많았기 때문에, 머리 모양을 바꾼 건 꽤 효과적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이것도 운명-”

말도 안 돼요.”

어머나.”

리츠코가 단칼에 말을 자르자 아즈사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리츠코는 어깨를 으쓱하며 어쩔 수 없이 따라 웃어버렸다.

정말이지, 조금도 변하지 않으셨군요, 아즈사 상은.”

리츠코 상도요. 가게는, 변해버린 것 같지만…….”

아즈사는 텅 빈 가게를 올려다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아 보였다. 아마 여기 오는 길에 누군가에게 소식을 전해들은 모양이라고 리츠코는 짐작했다.

, 이왕 이렇게 되어버린 거 어쩌겠어요. 그렇다고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죠.”

그럼, 리츠코 상.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일단 모아놓은 돈이 있으니까, 이번에야말로 제 가게를 차려야죠.”

아니면, 저희 집에 들어와 같이 사시는 건 어떠세요?”

절대 사양이에요.”

후훗, 리츠코 상답네요.”

아즈사 상이야말로…….”

리츠코 상.”

아즈사는 그녀를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리츠코는 긴장해서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아즈사가 저런 표정으로, 저런 눈빛으로 다가올 때마다 항상 그랬다. 그런 것도 변하지 않은 것이다.

혹시, 혹시 말이죠……. 여기서 저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 아닌가요?”

리츠코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아즈사의 맑은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차가운 아침 공기에 따뜻한 햇살이 섞여 피부에 뭔지 모를 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녀는 눈을 피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

리츠코는 대답했다.

,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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