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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타카유키 AU-달에 내리는 눈

치하미키 AU의 외전입니다. 주인공은 유키호. 커플링은 아마 타카네x유키호.

이것도 만7천자.... 외전이 더 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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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 내리는 눈

 

 

조용하던 밤거리에 비명소리가 터졌다. 가게마다 사람들이 등불을 들고 여기저기서 뛰쳐나왔다. 수로를 사이에 끼고 있는 길 위에 한 소녀가 쓰러져 있었다. 어디선가 도망쳐 나온 듯한 모양새였다. 고급스러울 게 분명한 기모노의 무늬는 어둠과 핏자국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 주위를 둥글게 둘러싼 사람들이 저마다 더 잘 보려고 목을 길게 빼며 한 마디씩 했다.

무슨 일이야?”

누구야?”

여자애잖아.”

누구네 집 애야?”

세상에, 피 좀 봐.”

못 보던 앤데.”

, 정신 차려봐!”

누가 구급약 좀 가져와!”

안 돼.

따귀처럼 쏟아지는 말들을 들으며 소녀는 무의식적으로 그 말을 떠올렸다. 꿈을 꾸는 것처럼 자각할 수 없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안 돼, 날 살리지 마요. 안 돼.

아아, 하지만 고통스럽게 죽는 것도 싫어.

아니, 사실은 죽는 게 제일 무서워.

소녀는 피가 흐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죽는다면 평화롭게, 고통 없이 죽고 싶다고 늘 생각해왔다. 하지만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죽음이 다가오면 편해지는 것일까? 누군가 팔에 따뜻한 손을 대는 것이 느껴지더니 의식이 점점 멀어지는 동시에 고통이 잦아들었다. 이게 죽는다는 걸까. 아아, 드디어 모든 게 끝나는구나,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소녀의 이름은 하기와라 유키호였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가게에 들이닥친 이들로부터 리츠코는 자초지종을 전해 들었다.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후, 리츠코는 죽과 약이 든 쟁반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 유키호가 있는 방문을 열었다. 그녀는 그새 일어나서 힘없이 벽을 쳐다보고 있었다. 피부는 창백했고 눈에는 생기가 전혀 없어 언뜻 보면 시체가 앉아 있는 것처럼 오싹한 모습이었다. 리츠코는 마음을 다잡고 그녀 옆에 쟁반을 내려놓은 후 무릎을 꿇고 앉아 입을 열었다.

몸은 좀 어떠니?”

…….”

유키호는 아무 말 없이 여전히 벽만 쳐다보고 있었다. 리츠코의 말이 들렸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아키즈키 리츠코라고 해. 여긴 유곽이고, 나는 이 가게의 관리인이야.”

…….”

어제 일 기억나니?”

리츠코가 그렇게 말하자 유키호는 흠칫 어깨를 떨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약한 비명을 질렀다. 리츠코는 서둘러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그녀는 이 일을 해오면서 나름 여러 가지 경험을 겪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리츠코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계속 다독이자 유키호의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녀는 쉰 목소리로 마침내 첫 말을 꺼냈다.

……여긴 어디죠?”

역시 조금 전에 한 말은 못 들은 모양이었다. 리츠코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관리하고 있는, 유곽이야. 너는 어제 이 가게 앞에 쓰러져 있었어. 피를 흘리면서. 내가 응급 처치를 했고. 그리고 아침에 너희 집 안 사람들이 왔는데…….”

그러자 유키호는 또 다시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녀의 귀에는 리츠코의 말이 뚝뚝 끊기며 들렸다.

……네 아버지가 진 빚 때문에……

……이제 그 집으로 돌아가는 건 너무 위험하다고……

……그러니까, 너를 잘 부탁한다면서, 대신 계약을……

……유키호? 듣고 있니? 유키호?”

…….”

유키호는 고개를 젓다가, 끄덕였다가, 다시 저었다. 리츠코는 듣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다시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여기서 유녀로 지내면, 네 숙식은 해결되고, 또 돈을 벌수도 있어. 얼마나 오래 벌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그 사람들이 말하길 3년 안에는 찾으러 오겠다고 하더라.”

리츠코는 정해진 대본의 대사를 읽듯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투에는 그 말을 한 이들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태도가 깔려 있었다.

하지만 난 네가 거부한다면 이 일을 시키지 않을 생각이야.”

리츠가 단호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유키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살면서 스스로 뭔가를 선택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 순간에는 오히려 그런 말을 한 리츠코가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자신은 이제 돌아갈 곳이 없었다. 돌아갈 곳을 새롭게 찾을 용기도 없었다.

……무슨 일이든지 할게요.”

유키호는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양 무릎 사이로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깊은 곳에서부터 절망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여기 있게 해주세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유키호는 조금씩 기력을 회복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집에서 도망쳐 나올 때 입고 있었던 고급 기모노를 버려버렸다. 어차피 피와 진흙이 잔뜩 묻어 있어 더 이상 입고 다닐 수도 없었다. 수수하고 새하얀 생활용 화복으로 갈아입은 뒤, 유키호는 리츠코가 지정한 방 안에만 하루 종일 틀어박혀 지냈다. 가게의 유녀들은 그런 그녀의 뒤에서 여러 가지 말들을 수군거렸지만 유키호의 귀에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결국 시간이 지나자 그들 모두 새로운 아이가 온 것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유키호는 무척이나 조용했고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죽도 입에 못 대던 유키호는 조금씩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보통 사람의 식사량의 절반도 안 되는 양뿐이어서 리츠코는 걱정이 많았다. 유키호가 남들보다 배로 입에 대는 것은 차뿐이었다. 그녀는 차를 굉장히 잘 끓여서 곧 소문이 났다. 집에 있을 때 어릴 때부터 유명 다도가에게서 배웠다고 했다. 차를 잘 끓이는 게 유녀로서 좋은 재능인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리츠코는 유키호가 춤과 노래를 배우게 하려고 애썼다. 동료들과 함께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다보면 기운을 차릴까 싶어서였다. 다행히 유키호는 어느 정도 솜씨가 있었지만, 연습을 하는 것에는 소극적이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유키호가 자기 입으로 확고하게 의사 표현을 한 것은 처음으로 밤손님을 받기로 한 날이었다.

남자는 안 돼요.”

?”

그 말을 듣자 당황한 나머지 리츠코는 잠시 멍해졌다. 유키호의 태도가 전에 없이 단호했기 때문이다.

남자는 안 돼요, 남자 손님은 못 받겠어요.”

유키호가 다시 한 번 말했다. 리츠코는 직감적으로, 그녀를 절대 설득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머뭇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너도 알잖니, 유곽에 오는 건 대부분 남자 손님들이라는 걸.”

그래도 안 돼요. 여자 손님은 괜찮아요. 하지만 남자는,”

유키호는 말을 하면서 떠올리는 것만으로 공포스럽다는 듯 몸을 떨었다.

무서워서, 싫어요…… 나는 어릴 때부터 거의 남자밖에 없는 집에서 자랐어요. 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잡아오고, 욕을 하고, 때리고, 죽이는 걸 봤어요. 그런데도 나한텐 터무니없이 상냥했어요. 그게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세요?”

안 그래도 창백한 유키호의 얼굴이 말을 하면서 거의 새파랗게 보일 정도로 질려갔다.

부탁이에요, 리츠코 상. 남자 손님을 받는 일만은 못 하겠어요, 다른 건 뭐든지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알겠어, 알겠어…….”

리츠코는 다시 무너져 내리려는 유키호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 근심이 스쳤다.

 

 

유키호가 남자 손님을 받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삽시간에 가게 안에, 그리고 그 거리에 퍼졌다. 그런 아이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 즈음에야 유키호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밖에 거의 나가지 않았지만, 누군가 자기 방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떨었고 복도를 걸을 때는 항상 고개를 푹 숙이고 다녔다. 그런데도 이따금씩 자신을 향해 느껴지는 경멸과 동정에 찬 시선, 목소리들을 똑똑하게 구분해낼 수 있었다.

그녀는 처음 유곽에 오고 나서 며칠 동안은 동료 유녀들의 이름과 얼굴을 거의 모르고 지냈지만, 단 한 명, 미키만큼은 모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그녀는 가게의 누구보다도 강렬한 시선을 유키호에게 꽂았다. 유키호는 그녀가 두려웠다. 같은 여자인데도 남자보다 두려웠다.

……왜 저런 애를 계속 데리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거야, 리츠코.”

어쩔 수 없잖아, 이미 계약을 해버렸는걸.”

일을 못 하니까, 돈도 제대로 벌 수 없는데?”

어느 날 밤 유키호는 복도에서 미키가 리츠코와 대화하는 소리를 들었다.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벽에다 귀를 대고 그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리츠코는 미키의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대화를 끝냈다.

다음날부터 유키호는 다시 식사를 거부하기 시작했고, 밤에는 잠도 거의 자지 않았다. 가게 안에서 누구보다 잘 먹고 잘 자는 미키와는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그녀는 날이 갈수록 눈에 띄게 말라가기만 했다. 리츠코가 그녀를 달래도 보고 혼내도 보았지만, 좋은 쪽으로의 변화는 전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뭐, 리츠코상도 그냥 포기하면 좋을 텐데.”

유키호는 그 날도 어김없이 자기 방에 틀어박혀 무릎을 꿇고 앉아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바깥에서 미키를 비롯한 다른 유녀들이 제 얘기를 하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부시게 맑은 날씨였다.

죽을까.

유키호는 생각했다. 순간적으로 든 생각이 아닌, 오래 전부터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생각이 확고한 세 글자가 되어 머릿속에 떠오른 것 같았다. 그녀는 벽을 쳐다보았다. 집에서 도망칠 때 유일하게 챙겨 나온 삽 한 자루가 벽에 기대어진 채 놓여 있었다. 그 삽에도 피가 묻어 있었지만 리츠코가 닦아 놓았는지 깨끗했다. 유키호는 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삽 손잡이의 거친 표면이 닿자 스스로도 놀랄 만큼 안도감이 들었다. 그녀는 삽을 들고 방을 나와 1층으로 내려갔다. 뒷문을 열자 탁 트인 정원이 나왔다.

생매장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직접 본 적도 있었다. 어릴 때 집안 하인들이 빚을 지고 도망가는 사람들을 붙잡아와 삽으로 구멍을 파고 사람을 묻은 뒤 목만 꺼내놓고 며칠이고 내버려두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또는 머리조차 그 안으로 묻어버리든가. 그렇게 죽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적어도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중에는 가장 시도해볼 만한 방법이었다. 고통스럽게 죽는 것은 싫지만 지금은 죽기 위한 시도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정원의 한복판에 선 유키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사람의 시선이 덜 향할 것 같은 으슥한 구석을 찾았다. 그리고 그녀는 삽을 쥔 손에 힘을 주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 가녀린 몸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모를 정도로 악착같은 모습이었다. 구멍을 다 파내기 전에 누군가 자신을 발견하지 않길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삽을 땅 속으로 들이밀고 한 번씩 흙을 파낼 때마다 유키호의 코에 땀방울이 맺혔다. 구멍이 깊어질 때마다 그녀의 눈에선 빛이 사라졌다. 누군가, 초점 없는 눈으로 이를 악물고 말없이 구멍을 파내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면 영락없이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으리라.

……유키호?”

저 혼자 구멍을 파내는 것 같았던 삽이 움직임을 멈췄다. 유키호는 돌처럼 서 있었다. 뒤를 돌아보는 것이 두려웠다. 다른 목소리였다면 누가 자신을 불렀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하기와라 유키호.”

그 목소리가 다시 자신을 불렀다. 유키호는 천천히 몸을, 고개를 돌렸다. 시야에 흔들리는 은빛 실 같은 것이 먼저 들어왔다. 그것을 제외하면 온통 새까만 구멍처럼 보이다가, 점차 확장되면서 파란 하늘 아래 탁 트인 정원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장신의 여성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죠 상.”

삽이 유키호의 손에서 스르륵 미끄러지더니 맥없이 땅에 툭 하고 떨어졌다.

 

 

-저기, 머리카락이 나뭇가지에 걸려있어요.

긴 은발이 허공에서 우아하게 흔들렸다. 그 머리칼의 주인이 뒤를 돌아보자, 허리 아래에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어린 소녀가 보였다. 그녀는 작은 손을 뻗어 가지에 얽힌 머리카락을 풀어주었다.

-감사합니다.

묘한 말투였다. 그리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은색 머리카락, 어딘지 이국적인 용모와 분위기를 보며, 어린 유키호는 처음엔 그녀가 외국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소녀는 호기심과 동경에 차 반짝이는 눈으로 은발의 여성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손가락 하나를 입가에 가져다대며 비밀스럽게 웃었다.

그 여성의 이름이 시죠 타카네라는 걸 안 것은 아버지와 그녀가 대화하는 것을 몰래 듣고 나서였다. 아버지에게는 일 관계로 하루에도 몇 명씩 손님이 찾아왔는데, 타카네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유키호는 나이 많은 보모를 제외하곤 가까이에서 어른 여성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타카네에게 이끌렸고, 타카네는 그런 유키호를 너무 가까이 하지도, 멀리 하지도 않은 채 적당한 거리에서 지켜봐주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유키호에겐 최적인 방식이었다.

집안이 습격 받은 그 날 밤, 정신없이 도망치다가 언뜻 타카네를 보았던 것 같다고 유키호는 어렴풋이 떠올렸다. 다들 정신없이 달리는 와중에 그녀는 환히 빛나는 달 아래에서 꼿꼿이 서있기만 했다. 은빛 실 같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유키호는 타카네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종종 생각했다. 처음 만난 날부터 1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녀의 겉모습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 보였다.

오랜만이네요, 유키호.”

타카네가 말했다. 유키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유키호의 방 안에서 서로를 마주본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이런 곳에서 이런 처지로, 동경하는 그녀와 재회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수치스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만 싶었지만, 타카네는 그녀의 손님으로 들어온 것이다. 손님 앞에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여기에 당신이 있다는 건 꽤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다른 일들을 처리하느라 찾아오는 게 늦고 말았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아뇨, 아뇨. 제가 무슨 자격으로…… 시죠 상은 그러실 필요도 없는걸요.”

유키호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자 타카네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의 아버지께, 당신을 잘 부탁한다는 얘기를 들었으니까요. 당신이 성인이 되어 자립할 때까지 제겐 당신을 돌봐줄 의무가 있답니다.”

의무, 그 단어가 비수가 되어 유키호의 마음을 깊숙이 찌르는 것 같았다. 유키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 그렇군요.”

.”

타카네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럼 어떻게…… 여기서 지내는 건, 좀 어떠신가요?”

그 말을 듣자마자 유키호는 뭔가가,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가 목구멍까지 치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처음 이 가게에 온 날부터 조금씩 쌓여온 절망감, 죽고 싶다는 생각과 수치심, 괴로움 등이 해일처럼 그녀를 덮쳤다.

유키호는 참지 못 하고 울기 시작했다. 타카네는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재빨리 유키호를 향해 다가갔다.

죄송합니다, 제가 무슨 실례되는 말을…… 당연히 괴로울 텐데요…….”

사과하지 마세요, 하고 소리 지르려는 입을 유키호는 틀어막았다. 나한테 사과하지 마세요, 그게 더 괴로우니까.

잠시 동안 방 안에는 유키호가 울면서 신음하는 소리와, 타카네가 그녀의 등을 약하게 두드려주는 소리만 나직하게 들렸다.

허면,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타카네가 그 말을 꺼내며 유키호를 똑바로 쳐다보자 유키호는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앞으로 매일매일, 제가 이 가게에 당신의 손님으로 찾아오겠습니다. 그걸로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드리고, 집 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얘기해드릴 수 있을 겁니다.”

유키호의 눈이 토끼처럼 커졌다.

그런그렇게 하시면, 시죠 상께 너무나 민폐가…….”

그 정도 여유는 있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답니다.”

타카네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그렇게 한다면, 유키호, 당신은 여기서 힘을 낼 수 있겠나요?”

어디선가 풍경 소리가 들렸다. 유키호는 마음이 서늘해졌다. 타카네의 눈은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어릴 때부터 보아온, 신뢰와 애정이 담긴 눈길이었다. 그걸 보는 것만으로 유키호는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그녀는 자기가 뭐라고 말하는지도 모르는 채 홀린 듯이 대답했다.

…….”

눈물이 흘러내리려는 것을 겨우 참으며 유키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 힘낼게요. 시죠 상.”

 

 

그 말대로 타카네는 매일같이 유키호를 찾아왔다. 그것도 매번 가게 문을 여는 시간을 딱 맞춰서 1분이라도 늦거나 일찍 오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곧 그녀에 대해서는 가게 아이들도 모두 알게 되었다. 당연히 그녀들은 유키호에게 정부가 생긴 모양이라며 수군거렸다. 유키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매일 타카네를 볼 수 있게 됐다는 사실만으로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타카네는 매일같이 찾아와 정말로 이야기만을 하고 갔다. 집 안의 다른 하인들, 아버지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소식도 간간이 전해주었지만, 그보다는 그 날 하루 있었던 사소한 일들에 대한 얘기가 훨씬 많았다. 유키호는 그 쪽이 더 좋았다. 집 안 일에 대해서는 웬만하면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역 앞에 새로 생긴 가게에서 라멘을 먹었답니다.”

오늘은 그 가게 옆의 우동 집에서 우동을 먹었답니다.”

이 경단은 정말 맛이 좋군요.”

……등등, 대부분 먹을 것에 대한 이야기이긴 했어도 말이다.

타카네가 자신에게 얘기를 해주는 만큼, 유키호도 타카네에게 뭔가 얘깃거리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 안을 깊이 잠식하고 있던 절망 속에서 빠져나와 일상에서 찾아낼 수 있는 사소한 이야기들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 오늘은 리츠코 상이 새로운 노래를 가르쳐주었어요.”

미키가 오늘도 연습에 나오지 않아서 리츠코 상이 엄청 화를 냈어요.”

시죠 상, 오늘 차 맛은 어떤가요? 처음 끓여보는 종류거든요.”

타카네가 먹을 것을 아주 좋아한다는 걸 알기에, 유키호는 그녀를 대접할 때마다 다른 종류의 차와 간식을 내놓으려고 애썼다. 타카네가 그것들을 입에 넣고 즐거워하는 것을 보는 게 유키호에겐 커다란 기쁨이었다.

차 맛이 아주 좋네요, 유키호.”

타카네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유키호는 환히 미소 지었다. 정말로 드물게 짓는 웃음이었다.

당신은 어릴 때부터 차를 잘 끓였죠.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유키호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타카네는 웃으며 말했다.

그건,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는 거랍니다.”

유키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맙다고 중얼거렸다.

물론 그들이 먹을 것에 대한 얘기만을 하는 건 아니었다. 타카네는 늘 저녁 시간대에 유키호를 찾아와 얘기를 나눈 뒤,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곤 했다. 그러나 달이 밝게 뜨는 날만큼은 달랐다. 유키호는 어릴 때부터 그녀가 달이 밝게 뜨는 날을 기막히게 잘 맞추던 걸 알고 있었다. 그런 날에는 밤늦게까지 남아서 유키호와 함께 달을 바라보며 차를 마셨다. 유키호는 그런 날이면 특히 더 타카네가 오는 것이 기다려졌다.

그래도 타카네가 자고 가는 일은 없었다.

하기와라 유키호, 달에도 눈이 내릴 거라고 생각하나요?”

?”

유키호는 갑작스런 타카네의 질문에 입을 살짝 벌리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타카네는 평소와 같이 신비로운 웃음을 띤 채 달을 올려다보다, 유키호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유키호는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글쎄요, 아마 안 내리지 않을까요.”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타카네가 다시 물었다. 유키호는 어쩐지 시험받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게 두렵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카네에게라면, 무엇을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달님은 그냥 있어도 추워 보이는 걸요. 눈까지 내리면 더 추워질 거예요.”

……달이, 추워 보인다구요?”

,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유키호가 대답했다. 그녀는 찻잔 속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 날 밤의 달은 유독 크고 밝아서 차 위에 비친 그림자조차 선명하게 보였다.

하지만 저는 그런 달님이 좋아요.”

…….”

타카네는 말없이 유키호를 바라보았다. 유키호는 어쩐지 부끄러워져 계속해서 찻잔 속 달만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달님은 어두운 밤을 밝혀주는, 고마운 존재니까요. 제가 어릴 때 시죠 상이 자주 말해주셨잖아요.”

……그랬군요.”

잊어버리셨나요?”

아니요, 기억하고 있었답니다.”

타카네는 그렇게 말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유키호는 그 말을 듣자 안심이 되었다.

그녀는 찻잔에 비친 달에서 시선을 떼고 진짜 달을 올려다보았다. 타카네가 유독 달과 겹쳐 보여서인지 달을 볼 때마다 타카네가 떠오르곤 했다. 태양은 너무 뜨겁고, 잘난 척 하는 것 같아서 싫어. 태양이 남자라면 달은 여자겠지, 유키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누가 봐도 유키호의 상태는 놀랄 만큼 호전된 것으로 보였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녀는 더 이상 죽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식사도 남들과 비슷한, 정상적인 양으로 하게 되었다. 연회에 나가는 일도 잦아졌다. 그녀가 일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자 리츠코는 감동해서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다만 미키만은 그 사실에 별로 기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유키호는 점차 웃음을 되찾아 타카네 앞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어울려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유키호는 자신의 그런 변화가 두렵기도 했고 행복하기도 했다.

타카네의 발길이 뜸해진 것은 그 즈음부터였다.

처음에 유키호는 일이 바빠서 자주 못 오게 될 거라는 타카네의 말을 믿었다. 그러나 매일 오던 것이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바뀌자 불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집안 일이 정리될 모양이에요.”

타카네가 그녀에게 말했다. 유키호는 타카네가 자신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는 여자들뿐이어서 어느새 유키호에게 무척 편하게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우락부락한 남자들 틈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삶이 안전해지면 타카네가 그녀를 계속 돌볼 의무도 없어진다. 유키호의 불안과 걱정은 날이 갈수록 커져갔다.

항상 그런 식이란 거야, 유키호.”

어느 날 복도를 지나가고 있는 유키호를 향해 미키가 말했다. 유키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미키는 웃고 있었다.

가장 행복해졌다고 생각했을 때, 나락에 떨어진다구. 발길이 뜸해지는 것, 그게 신호야. 그리고 잊어버리지. 항상 그렇게 버림받는 거야, 유녀란 말이야.”

미키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특유의 흘리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유키호는 그녀에게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실제로 화도 나지 않았다. 그 텅 빈 듯한 웃음을 본 순간, 유키호는 처음으로 미키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미키는 유키호의 그런 눈빛을 바로 알아보았다. 잠시 그들 둘 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왠지, 재미없단 거야.”

미키는 그 말만을 남기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유키호는 닫혀버린 그녀의 방문을 말없이 쳐다보다 자신도 방 안으로 들어갔다.

 

 

타카네가 2주 만에 다시 유키호를 찾아온 것은 보름달이 무척 밝게 뜬 날 밤이었다. 항상 유곽이 문을 여는 시간에 정확히 맞춰 찾아오던 타카네였지만, 그 날은 해가 지고 달이 뜬 다음에야 찾아왔다. 유키호는 타카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걸 보고도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달이 뜬 것을 보자마자 타카네가 찾아올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 동안 찾아오지 못 해서 미안합니다, 유키호.”

타카네가 방 안에 들어와 앉아 그렇게 말했지만, 유키호는 일부러 그녀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는 달을 바라보는 척 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에요, 시죠 상. 바쁘실 텐데 다시 찾아와주셔서 기뻐요.”

이런 뻔한 대사를, 자신이 말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는 일은 잘 끝내셨나요?”

유키호는 여전히 타카네를 보고 있지 않은 채 그렇게 물었다. 타카네는 잠시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그게, 아무래도…….”

제가 지겨우신가요? 시죠 상.”

유키호는 타카네의 말이 끝나기 전에 불쑥 다시 말을 꺼냈다. 질문이라기보단 원망이 담긴 것 같은 목소리였다. 타카네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유키호…….”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마침내 유키호가 창가에서 몸을 돌려 타카네를 향해 말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두 손을 가슴 위에 모으더니 정신없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렇죠, 그렇잖아요, 저 같은 걸 매일 매일 보러 오는 게 뭐가 재밌으시겠어요. 이해해요, 시죠 상…….”

유키호…….”

타카네가 난처한 듯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유키호는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아요. 그저 이렇게 매일, 아니 매일이 아니더라도, 가끔씩 시죠 상과 만날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니까요. 그러니 시죠 상, 부탁이에요, 매일이 아니어도 좋으니까 나를 만나러 와주세요. 나를 버리지 말아요…… 아아, 하지만 제가 지겨우신 거죠. 저는 정말로 구제불능이니까요. 미키처럼 예쁘거나 춤을 잘 추지도 않고 리츠코 상처럼 똑똑하지도 않고…….”

유키호.”

저도 제가 싫어요. 태어난 이후로 단 한 번도, 내가 하기와라 유키호라는 사실을 좋아해본 적 없었어요. 아버님도 항상 말씀하셨죠, 남자애면 좋았을 거라고, 남자애면 집안일을 물려주었을 텐데, 남자애라면, 남자, 남자, 남자!”

유키호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지더니 마치 새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그녀는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으며 울기 시작했다. 타카네가 일어서서 유키호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뿌리쳤다.

잠시 후,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짓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죄송해요, 죄송해요, 시죠 상! 제가 무슨 짓을…… 제가 무슨 말을…….”

괜찮습니다, 그보다 유키호.”

타카네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진정해주세요.”

유키호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거의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보였다. 잠시 동안 방 안에는 유키호가 조용히 색색거리며 내쉬는 숨소리만이 들렸다. 타카네가 선 채로 그녀를 내려다보자 유키호는 위압감 때문에 더욱더 겁에 질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저는, 지금까지 당신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것 같군요.”

타카네가 말했다. 유키호는 여전히 입을 막은 채 크게 고개를 저었다. 눈물은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나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타카네는 그렇게 말하며 유키호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과 목소리, 눈빛이 어찌나 깊은 슬픔에 잠겨 있던지 유키호는 죄책감으로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마지막으로 알려드릴 소식은……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이제 당신은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유키호는 딸꾹질을 시작했다.

당신은 여기에서 행복하고 안전해 보이니, 저를 볼 때마다 집안이 생각나면 괴로우시겠지요. 앞으로는 찾아오지 않겠습니다.”

타카네는 겨우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것조차 너무나 슬퍼 보이는 미소였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유키호.”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 타카네를, 유키호는 붙잡지 않았다. 붙잡을 수 없었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타카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타카네가 나간 뒤 문이 닫히는 걸 보며, 유키호는 스르륵 바닥에 주저앉았다. 두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얼굴에는 핏기가 조금도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돌처럼 앉은 채, 아침 해가 뜰 때까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창밖에서 흘러내리는 달빛이 그런 그녀를 조용히 비춰주었다.

 

 

눈이 내렸다. 소복소복 쌓이고 있는 흰 눈밭 위로 유키호는 조용히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갔다.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바람에 흩어지며 사라졌다. 그녀는 빨갛게 언 두 손을 비비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 해 겨울에는 추위보다 뭔지 모를 불안감이 먼저 닥쳐왔다. 묘하게 처진 거리의 분위기와 두셋씩 모여 걱정스러운 듯 수군거리는 이들을 보며 유키호 역시 그런 낌새를 눈치 채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리츠코의 입에서 가게 문을 닫는다는 말이 나왔을 때, 그녀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었다. 유키호가 그 가게에서 일을 한 건 3년 정도였지만, 그 시간은 정이 들기에 충분했다.

리츠코는 유키호에게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다. 유키호는 단박에 그 뜻을 알아들었다. 동시에 여기 처음 온 날에도 자신의 선택을 묻던 리츠코가 떠올라 조금 반가우면서도 애달픈 기분이 들었다. 이 애들은 옆 마을 가게로 옮겼고, 저 애들은 이 가게로, 저 가게로, 너만 괜찮다면 추천장을 써줄 수도 있어……. 열심히 설명하던 리츠코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 예전에 너를 자주 찾아오던 여자 손님 있잖니, 연락이 닿으면 그 분께 데려가 달라고 부탁해보지 그래.”

그 말을 듣고 유키호는 씁쓸히 웃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녀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하긴 누구나 타카네를 한 번 보면 쉽게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유키호는 리츠코에게 추천장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유키호는 가게를 나올 때 리츠코에게 받은 돈으로 값싼 여관에서 허름한 방 하나를 빌렸다. 그런 초라한 곳에서라도 계속 살기 위해선 돈을 벌어야 했다. 유키호는 리츠코가 써준 추천장을 들고 역 앞에서 꽤 인기가 있다는 찻집을 찾아가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제각각 어디로 갔는지 자세히는 몰랐지만, 미키가 옆 마을의 하급 유곽에서 일하는 걸 봤다는 말을 들었을 땐 조금 놀랐다. 미키에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동시에 그녀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유녀가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있는 미키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가끔 만나러 가면 반겨주려나, 지금도 미키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지만, 예전만큼은 아니었다.

찻집에서 간단한 고용 절차를 마친 후 유키호는 다음 주부터 일하러 나오라는 말을 들었다. 어차피 오후에 따로 할 일도 없었기에 그녀는 익숙해질 겸 가게 일을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찻집 주인은 상냥하고 온화해 보이는 중년 남성이었다. 유키호는 더 이상 예전만큼 남자가 무섭지도 않았다. 스스로도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가게 앞에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좀 치워야겠어.”

주인이 그렇게 말하며 일어서자 유키호가 재빨리 손을 들었다.

, 그럼 제가 할게요.”

남자들을 시키면 되는데 왜 아가씨가.”

괜찮아요, 전 가게에서도 그건 제 일이었으니까요.”

유키호는 그렇게 말하고 항상 들고 다니는 삽을 들어 올리며 웃어 보였다.

가게 문을 닫고 나온 유키호는 두터운 입김을 뿜어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해가 지고 달이 뜨려 하고 있었다.

달이 환히 뜨는 날이면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자기도 모르게, 어디선가 은빛 실 같은 것이 나타나지 않을까 찾아보곤 했다. 타카네가 그런 식으로 유키호를 떠난 후 유키호는 한동안 그녀가 그립지도 보고 싶지도 않았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괴로웠던 것이다. 아마 자신이 정말로 변하기 시작한 건 그 때부터인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빛 아래서 그녀가 비밀스런 웃음을 지으며 나타난다면, 자신도 마주 보며 웃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유키호는 주인이 빌려준 장갑을 몇 겹이나 낀 손으로 삽의 손자루를 꽉 쥐고 눈을 파내기 시작했다. 몇 분도 안 되어 몸에 땀이 찼다. 여관 근처에 목욕탕이 있으면 좋을 텐데. 유키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를 쓸었다.

한창 눈을 파내다가도, 가게를 찾아온 손님들의 사박거리는 발소리가 들리면 유키호는 하던 일을 멈추고 허리를 들어 수줍게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두 분이신가요?”

어서 오세요, 날이 많이 춥네요.”

어서 오세요, , 안쪽으로…….”

그러기를 30분쯤 지났을 때, 그녀는 슬슬 힘이 부치는 것을 느끼며 삽에 묻은 눈을 털어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 또다시 발소리가 들렸다. 유키호는 뒤돌아서 말했다.

어서 오-”

너무나 익숙한 은빛 머리카락이 내리는 눈발과 함께 바람에 흔들렸다. 유키호는 말이 목에 탁 걸린 듯 입을 벌리고 눈앞에 서 있는 여성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비밀스런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입니다, 유키호.”

전에도 이렇게 삽질을 하다가 타카네를 만난 적이 있던 것을 떠올렸다. 왜 항상 이런 식인 걸까. 한겨울 저녁인데도 부끄러움으로 온몸에 열이 확 끼치는 것을 느꼈다. 타카네는 그런 유키호를 웃는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

잘 지내고 계셨던 것 같군요.”

, …….”

유키호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타카네를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있었지만 막상 만나니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타카네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눈치 챈 듯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유곽 문이 닫혔다는 말을 듣고 당신이 어디로 갔는지 걱정이 돼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라셨다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뇨, 아뇨. 그런…….”

유키호는 제대로 말을 하지 못 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 시죠 상은, 그 동안 어떻게……?”

그 말에 타카네는 손가락 하나를 입가에 가져다대며 웃었다.

그것은, 비밀이랍니다.”

그렇겠죠, 유키호는 따라 웃었다. 정말로 궁금해서 물은 건 아니었다.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타카네는 다시,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다시 자신을 찾아와 주었다. 그것만으로……

……어째서,”

유키호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어째서 시죠 상은 저 같은 걸 그렇게 신경 써주시는 건가요……?”

그녀의 손에서 삽이 떨어졌다. 타카네는 묵묵히 유키호를 바라보았다.

그 때 제가 그렇게 심한 말을 했는데도, 왜 또 다시…… 이제 아버님의 말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잖아요? 그런데 왜, 시죠 상은…….”

유키호는 울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놀랄 정도로 차분한 상태였다. 그녀는 침착하게 타카네의 대답을 기다렸다.

시죠 상과 함께 있으면 기대를 해버려요. 저 같은 애한테도, 좋은 점이 있을까 하는 기대를…… 부탁이에요, 대답해 주세요.”

그 말을 듣고 타카네가 입을 열자 그녀의 입에서도 입김이 피어올랐다. 유키호는 조금 놀랐다. 타카네는 인간이 아닐 것만 같았기에.

……저는 그 때, 당신이 너무나 약해져 있을 때 당신을 찾아갔죠. 그게 문제였던 게 아닐까요.”

타카네가 말했다. 유키호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타카네는 다시 웃었다.

제가 달에 대한 얘기를 했던 것은 기억하면서, 눈에 대해 얘기했던 건 기억하지 못 하나요? 유키호.”

…….”

유키호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타카네는 한 손을 들어 손바닥이 하늘로 향하게 펼쳐 보였다. 눈송이 하나가 그녀의 손바닥 위로 조용히 떨어졌다.

달에 눈이 내리면 추워질 거라고 했죠. 나는 그 반대로 생각했어요.”

타카네의 낮고 침착한 목소리는 눈과 찬바람 속을 뚫고 유키호를 향해 똑바로 가닿는 것처럼 들렸다.

눈은 사실, 겨울의 차갑고 쓸쓸한 땅을 따뜻하게 덮어주기 위해 내리는 게 아닐까 하고.”

유키호는 눈을 깜박거렸다. 눈물이 얼어붙은 속눈썹이 무거웠다.

유키호, 당신이 자신에게 자신이 없는 건…… 남들의 배로 상냥한 마음씨를 가져서, 자기 자신은 제대로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랍니다. 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그것을 알고 있었지요.”

타카네는 잠시 말을 멈추고 유키호를 바라보았다. 유키호는 그 눈빛에 가득 담겨 있는 애정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이 그걸 직접 깨닫게 하기 위해 얼마나 애써왔는데요.”

타카네의 그 말에 유키호는 고개를 숙였다. 다시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삼킨 후, 그녀는 고개를 들고 웃었다. 붉어진 뺨 위로 퍼지는 미소가 너무나 눈부셔 보였다.

……고마워요, 시죠 상.”

타카네도 그녀를 마주보고 미소를 보냈다.

그럼, 이만 들어가도 될까요? 이 가게의 경단을 먹어보고 싶었어서.”

유키호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 차를 끓여드릴게요.”

그것 참 기대되는군요.”

타카네는 가게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달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언젠가, 정말로 달에도 눈이 내린다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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