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랜만에 글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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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잠깐 내렸다 그친 비 때문에 거리는 물기를 머금어 반짝이고 있었다. 가로등의 불빛과, 여러 가게들의 간판 네온사인이 호수에 비쳐 화려하게 빛나며 호텔로 돌아가는 동안 자연스럽게 야경을 선물했다. 그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움과, 유명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먹은 맛있는 음식, 약간의 술에 취해 치하야는 순수하게 즐거움을 느끼며 걸어가고 있었다. 미키는 그런 치하야를 보며 더욱 즐거워했다. 둘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마치 춤을 추듯 걸어갔다. 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조금 전 식사를 마치고 나오다 발견해 잠시 구경했던 길거리 밴드의 노래였다. 그 애들은 뉴욕에 있는 예술 고등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작사, 작곡을 직접 한 것도 놀라웠지만 메인 보컬인 소녀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파워풀하면서도 따뜻하고 안정감 있던 목소리가 치하야의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울렸다.
“치하야 씨, 무슨 생각해?”
미키가 치하야의 손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늘 그렇듯이 치하야보다 더 많이 마셔서 약간 취한 상태였다. 붉게 물든 미키의 얼굴이 치하야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까 그 애들, 굉장했지.”
“아아, 맞아. 재미있었어.”
“연주도 좋았지만 노래도- 정말 잘하더라.”
“미키는 치하야 씨 노래가 더 좋은데?”
미키가 농담조로 그렇게 말하자 치하야는 못 들은 척 했다.
“…뭐랄까. 그 애들, 우리보다 어려 보이던데, 프로도 아닌데, 정말 잘 했잖아. 역시 세상은 넓어. 이곳에는… 재능 있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저마다 그 재능을 힘껏 부딪치고 갈고 닦아 더 아름다운 걸 만들지…… 여기에 오길 잘 했어…….”
치하야는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리고 떨어질 것 같은 머플러를 다시 추스르고, 정신을 차리려는 듯 머리를 흔들며 난간을 붙잡았다. 검은 호수 위로 흰 빛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치하야는 그 중 한 점을 가만히 응시했다.
“흐응.”
치하야의 말을 들은 미키는 뭔가 생각하더니 잠시 후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미키는 좀 재수 없던데.”
“뭐?”
치하야는 고개를 돌려 미키를 바라보았다. 미키는 취했어도 취하지 않은 상태와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잘난 사람을 보면 재수 없어 하는 게 사람 심리라고, 당연한 거 아냐.”
미키가 워낙 태연하게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치하야도 순간 그게 정말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미키는 두 손을 허리에 짚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허연 입김이 퍼졌다.
“그래서 미키, 그 때 하루카가 뮤지컬 역을 미키보다 잘 했을 때 좀 재수 없었어.”
“하루카가?”
치하야의 표정에 떠오른 의문을 보자 미키는 볼을 부풀렸다.
“작년에! 치하야 씨, 잊어버렸구나.”
“아니야, 기억해.”
“거짓말-”
“정말이라니까.”
치하야는 항의하듯 말했다. 기억하고 있는 건 정말이었다. 바로 생각나지 않았을 뿐. 이곳에 있으면 일본에서 있었던 일들은 날이 갈수록 조금씩 흐려지는 것 같다.
“하루카뿐만 아니라, 다른 사무소 아이돌 중에도 좀 재수 없는 애들 있었어- 물론 제일 반짝이는 건 미키였지만, 그래도 재수 없었단 말이야. 미키가 출연하고 싶은 광고나 드라마에 다른 아이돌이 나올 때나, 미키보다 더 주목받을 때? 치하야 씨는 그런 적, 없어?”
“……글쎄, 아이돌로서 일이 별로 들어오지 않을 때는 확실히 좀 속상했지만…… 나는 그냥 ‘더 열심히 해야지’, 하고 생각했던 것 같아.”
“아핫, 역시 치하야 씨는 대단하단 거야.”
미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치하야는 한 가지 궁금한 게 생각났다.
“그럼 나는? 나도 재수 없었어? 미키는 그런 말 한 적 없잖아.”
“그러네, 치하야 씨는 재수 없지 않아. 미키는 치하야 씨를 존경하는걸.”
미키는 또다시 아주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리고 본인도 궁금한 듯 눈을 굴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왜일까… 치하야 씨는 뽐내지 않으니까?”
“겸손하다는 거야?”
“아니, 겸손하면 더 재수 없어.”
미키가 딱 잘라 말했다.
“그냥 치하야 씨는…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인다고 해야 하나. 자신의 재능도, 부족한 점도, 그냥 사실일 뿐인 거야. 그걸 특별히 자랑스러워하지도 자괴감을 느끼지도 않는 것 같아. 그래서 치하야 씨는 빛나 보이는 거야.”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술술 내뱉는 미키를 보며 치하야는 어쩐지 부끄러워져 고개를 숙였다. 미키는 그런 치하야를 보고 웃으며 다시 팔을 잡아당겼다.
“하아- 하지만 맞아. 정말 굉장했어. 세상엔 굉장한 게 너무 많아! 이 거리도, 너무 예쁘고, 아까 먹은 음식도 너무너무 맛있었고, 이 건물도, 이 도시도- 모든 게 너무너무 굉장해. 그래서 속상해. 미키는 별인데, 가장 반짝이고 싶은데, 이런 데 있으면 그냥 하나의 점으로밖에 안 보이는 것 같잖아. 미키는 미키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세상이 말하는 것 같다고.”
“그렇지 않아…….”
주정인 걸까, 진심인 걸까, 아니면 둘 다… 치하야는 속사포로 떠들어대는 미키를 보며 약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택시를 불러 타고 가는 게 좋을까?
“……정말 싫어, 그런거-”
미키는 터벅터벅 걸어가다가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치하야는 깜짝 놀라 미키를 쫓아갔다. 취해 있는데도 치하야보다 빨랐다. 미키는 호수를 가로지르는 아치형 다리 위로 올라가 숨을 한껏 들이마시더니,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소리쳤다.
“정말 재수 없어, 재수 없어, 재수 없어, 재수 없어, 재수 없어, 재수 없다고-!”
치하야는 미키한테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호흡을 고르며 서 있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나서, 고개를 떨군 미키의 두 눈은 젖어 있었다. 마치 비가 오고 난 후의 이 거리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치하야는 조심스럽게 미키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난간을 붙잡고 있는 미키의 손이 하얗게 물들었다.
미키는 치하야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그러다 떨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미키가 존경하는 건, 치하야 씨뿐이야.”
치하야는 손을 뻗어 미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그 손길로 인해 무너지듯, 미키는 치하야의 품에 안겼다. 치하야는 호수 위 한 점의 빛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알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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