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쿠치 마코토에게는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하루슈타인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마미 하루카’ 에 관한 것이다. 마코토의 기억 안에서 그 두 가지는 절대 섞이지 않고 칼로 잘린 듯 괴리감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서로 다른 세계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마코토, 나 말야.
아이돌이 될 거야.
붉은 리본을 앞머리 양쪽에 매단 소녀가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는다. 주변은 어딘지 그리운 시골 풍경으로, 파랗고 맑은 하늘 아래 푸른 산과 밭이 널찍하게 펼쳐져 있다. 아름답지만, 웃고 있는 소녀의 얼굴이 너무나도 환해 그녀 주변으로 배경이 빨려 들어가는 듯 보인다.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그 순간은 정지해 있다.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마코토가 느끼는 감정은 그리움보다는 죄책감이었다. 그녀가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언제나 그 죄책감이 자신의 발목에 쇠고랑을 채워 사슬을 끌고 다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갈수록 기억은 점점 흐려져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그런 죄 의식을 느끼게 된 건지 마코토 자신도 명확하게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느낌만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마코토의 마음속을 떠돌아다녔다.
마코토는 매일, 꿈을 꾸듯 그 기억을 떠올렸다. 떨리는 손을 들어 얼굴로 가져가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히비키의 말대로 ‘호시이 미키’를 찾아갔을 때, 그녀는 사진으로 본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막 정비를 끝낸 로봇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마코토는 미키를 깨우고 할 말을 하며 그녀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호시이 미키, 15세. 조종하는 로봇의 이름은 ‘IMR-765-N 릿체인’. 키사라기와 구동 방식이 동일하며 사실상 만들어진 근원이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키사라기와 릿체인이 결합할 경우 상당히 위험한 적이 될 것이다. 미키와 릿체인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그녀도 불필요한 싸움은 피하려는 듯 자주 출격하지는 않았다.
미키는 잠이 덜 깬 얼굴로 눈을 비비며 마코토의 설명을 들었다. 그러는 동안 그녀도 마코토의 모습을 위아래로 찬찬히 뜯어보았다. 마코토는 무언가 불편한 기분을 느끼며 말을 끝냈다.
“……그러니까 네가 우리와 함께 싸워줬으면 해.”
미키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코토는 조바심이 나 미키의 표정을 다시 자세히 살폈다. 변덕스럽고 제멋대로라고는 들었는데, 그녀가 어떤 대답을 할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미키는 악명 높은 하루슈타인 군단의 간부인 자신을 눈앞에 두고도 전혀 두려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미키는 마코토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하품을 하며 다시 릿체인 위로 쓰러졌다. 그리고 눈을 반쯤 뜬 채 입을 열었다.
“그치만 미키는 이미 아미, 마미네랑 같이 싸우겠다고 약속해 버렸는걸.”
“뭐?”
“지난주에 찾아왔었거든. 자기들을 도와주면 미키가 원하는 만큼 주먹밥을 제공하겠다고 하길래, 알았다고 했지.”
마코토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겨우 주먹밥 때문에? 미키는 경계심이라곤 전혀 없는 태연한 얼굴로 마코토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코토의 손이 꿈틀거렸다. 어차피 적이 될 거라면 지금 여기서 없애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뭐, 좋아.”
“뭐?”
미키가 그렇게 말하자 마코토는 두 번째로 물었다.
“같이 싸워줘도 괜찮다고. 딱히 미키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으니까- 아, 하지만 아미 마미랑 약속한 게 먼저니까 일단은 그 쪽에 가 있을게.”
배신하겠다는 건가? 마코토는 미키의 표정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읽어내려 애썼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정말로 아무 생각이 없든가, 아니면…….
“하지만 조건이 있어.”
“조건?”
마코토는 미심쩍다는 듯이 말했다.
“보수라면 얼마든지-”
“그런 거 말고.”
미키는 침대에서 일어나 마코토를 똑바로, 빤히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얼굴이 손 한 뼘만큼을 사이에 두고 가까워졌다. 마코토는 자기도 모르게 조금 뒷걸음질 쳤지만 애써 미키한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미키는 씨익 웃더니 말했다.
“미키랑 데이트해줘.”
“……뭐?”
“미키, 당신이 마음에 들었거든. 아핫!”
미키는 그렇게 말하더니 천진난만한 얼굴로 웃었다. 마코토는 또다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후타미 자매의 키사라기와 호시이 미키의 릿체인 동맹 대 하루슈타인 군단. 미나세 이오리의 아즈사이즈와 시죠 타카네의 유키드릴은 그들과 교섭 중.”
히비키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손에 든 종이에 적힌 글을 술술 읽어 내려갔다. 마코토는 회의실 의자에 앉은 채 한 팔을 테이블 위에 짚고 멍하니 히비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럼 이걸로 우리는 두 명의 스파이가 있는 셈이네. 야요이와 미키.”
히비키는 종이를 휙 치우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완전히 한 편으로 만들지 못 한 건 아쉽지만. 뭐, 잘 했어! 축하하자구.”
히비키는 마코토에게 차가운 음료가 든 잔을 내밀고 자기 것도 들어 꿀꺽꿀꺽 마셨다. 마코토는 억지로 한 입 삼키고 잔을 내려놓았다. 속이 메스꺼웠다.
“만약 아즈사이즈나 유키드릴이 키사라기에게 협력한다고 해도, 전력은 여전히 우리가 우세하니까. 키라젬만 손에 들어온다면 완벽해.”
마코토는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히비키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왠지 긍정적이 됐네, 히비키.”
“그야 머리 싸매고 있어봐야 별 수 없잖아. 그보다 마코토, 오늘은 각하에게 안 가 봐도 되는 거야?”
“그래, 오늘은 괜찮아.”
마코토는 그렇게 말하고 의자에 앉은 채 다리를 굽혔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창밖의 검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임무를 완수하고도 마코토는 계속해서 마음 한구석 어딘가가 석연치 않았다. 미키와 데이트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은 아니었다. 설령 미키가 완전히 그들의 편에 선다고 해도 과연 승산이 있을까, 하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자, 들어봐, 이번 작전은 정말 완벽하고 명확해.”
히비키가 손을 비비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코토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돌렸다.
“벌써 몇 번이나 들었어.”
“그래도 또 들어! 절대로 실수가 없어야 하니까. 우린 내일 아이슬란드로 가서 그 곳에 배치된 하루슈타인 군단을 회수할 계획이야. 그리고 이 정보는 야요이를 통해 후타미 자매 측에 일부러 흘렸어. 즉, 함정인 셈이지.”
히비키는 자기가 세운 계획이 상당히 마음에 든 듯 자신만만한 태도로 말했다.
“후타미 자매는 우리가 전투 태세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기습을 하러 올 거야. 키사라기, 미키의 릿체인과 함께. 그들이 나타나면 숨어 있던 하루슈타인 군단이 포위하고 집중 공격하는 거지. 릿체인은 우릴 도울 테고! 이름하야 키사라기 완벽 파괴 작전!”
히비키는 그렇게 외치며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 위로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과연 그렇게 일이 잘 풀릴까.”
마코토가 맥없이 중얼거렸다.
“당연하지, 자신은 완벽하다구! 키사라기만 사라지면 각하의, 우리의 세계 정복은 코앞이야.”
히비키는 긴 검은 머리를 휘날리며 방 안을 빠르게 걸어 다녔다. 어쩐지 조바심이 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조금만 더 있으면… 전부 끝나는 거야, 조금만 더… 이 일이 끝나면 자신은 동물들이랑 함께 고향인 남쪽 섬으로 내려가서-”
“……뭐?”
마코토가 고개를 들자 히비키는 움찔 몸을 떨며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마코토는 히비키를 노려보며 무게가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히비키, 너 설마… 도망치려는 건 아니겠지?”
“도망이라니 그런 거 아냐! 그, 그러니까… 은퇴라고나 할까.”
히비키는 더듬거리며 변명하듯 말했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얼굴이 빨개진 것이 보였다. 마코토는 의자에서 일어나 히비키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히비키는 뒷걸음질 치다 벽에 등을 기대고 두려워하는 눈빛으로 마코토를 바라보았다.
“그럼 왜 네 말대로 세계 정복을 코앞에 둔 이 시기에 고향으로 내려간다느니 하는 말을 꺼내는 거야.”
“그, 그야-”
히비키는 말문이 막힌 듯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갑자기 두 눈을 질끈 감더니 결심한 듯 소리쳤다.
“-그야, 넌 아무렇지 않겠지. 자신은 너랑 달리 홀몸이 아니라구! 일이 잘못되면 가장 먼저 공격받는 건 하루슈타인 군단의 중심 기지인 이 성일 테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연구소나 동물들도…….”
히비키는 울상을 짓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마코토는 어이없다는 듯이 자신보다 작은 히비키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에 네 입으로 이번 계획은 완벽하다고 했잖아?”
“그, 그러니까 만에 하나- 잘못될 경우를 대비해…… 아니, 솔직히 자신은 이제 지쳤다구. 너도 그렇잖아? 마코토!”
갑작스레 자신을 향한 질문에 마코토 역시 당황하고 말았다. 히비키는 빨개진 얼굴로 마코토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각하는- 더 이상 예전의 각하가 아니라구. 점점 더 약해지고 불안정해져 가… 만약 이번 계획이 잘 된다고 해도, 설령 세계 정복에 성공한다 해도, 자신은 더 이상 각하를 믿을 수가 없어. 아니, 애초에 왜 여기 와서 각하를 따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 충성심은 있지만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더 이상 못 하겠어, 자신은 못 하겠다구- 야요이도 항상 말했어…….”
야요이의 이름이 나오자 마코토는 더욱 동요했다. 히비키는 울면서 벽에 등을 기대고 주르륵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너도 알잖아. 각하는 우리 따위 안중에도 없다구. 야요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 다음은 자신…… 그 다음은…….”
“닥쳐.”
“너도 솔직히 도망가고 싶잖아? 지겹지도 않아? 싸움 때마다 무슨 총알받이나 개 취급당하는 거나, 각하의 밤시중을 드는 거나-”
“닥치라고!”
마코토는 분노에 휩싸여 히비키의 멱살을 쥐고 거칠게 들어올렸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각하는 그럴 분이 아니야. 하지만 네가 도망치면 너나 네 동물들한테 훨씬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질 줄 알아!”
마코토와 히비키의 눈이 마주쳤다. 잠시 동안 둘 다 아무 말 하지 않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회의실 안의 싸늘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맴돌며 감쌌다. 마코토는 히비키의 멱살을 쥔 손을 천천히 내려놓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너 혼자 다 안다는 듯이 말하지 말라구.”
히비키가 뒤에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마코토는 못 들은 척 방을 나가고 문을 닫았다. 아마 내일이면 히비키는 이 성에 없을 것이다.
아니, 나는 아무것도 몰라.
마코토, 나 말야.
아이돌이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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