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레애니 20화-21화 사이. 카렌 1인칭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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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프로젝트 크로네>가 아직 준비 단계에 있을 때, 그러니까 나와 나오가 ‘트라이어드 프리머스’로서 데뷔하기 전의 일이다. 어느 날 프로듀서가 나를 불러 잠시 이야길 하자고 했다. 최근 단둘이 얘기하는 일은 거의 없었으므로 대충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짐작이 갔다. 프로듀서의 피곤과 죄책감에 찌든 얼굴을 보며 그의 변명 같은 설명을 듣고 있는 건, 정말이지 짜증이 났다. 그는 예전부터 우리의 데뷔가 늦어지는 이유에 대해 몇 번이고 같은 설명을 반복했고, 그 때마다 나와 나오는 알았다고, 기다리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날은 나오가 옆에 없었으므로 나는 더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다.
“……프로듀서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내 말에 프로듀서는 입을 꾹 다물 뿐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가 더 할 말이 없다는 걸 알고 가방을 들고 일어나 사무실을 나왔다. 그럴 때는 ‘어떻게든 해보겠다.’ 라든가 무슨 말이라도 해줄 수 없는 걸까. 언제부턴가 나는 그에게 그리 많은 것을 기대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기대하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던 중 복도 모퉁이 벽에 딱 붙은 채 엉거주춤 서 있는 나오를 발견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툭 치자 나오는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뒤돌아보았다.
“뭐야, 카렌이구나…….”
“여기서 뭐 해? 나오.”
“아니, 그냥…….”
나오가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슬쩍 나오 뒤를 쳐다보았다. 모퉁이를 돌면 바로 보이는 엘리베이터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뒷모습만 보고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미오잖아?”
그 때 엘리베이터가 이 층에서 멈췄고, 미오가 그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닫히자 나오는 어쩐지 안도하는 것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보자 뭔가를 깨닫고 어이가 없어진 내가 말했다.
“……나오, 혹시 미오를 피하고 있는 거야?”
“피, 피하다니! 따, 딱히 그런 건……!”
나오는 잔뜩 당황한 목소리로 부인했지만, 내가 입을 꾹 다물고 노려보자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눈을 피해버렸다.
“그런 건…… 아니지만.”
“나오, 이럴 땐 피하는 게 더 이상하다고. 그냥 평소처럼 인사하면 되잖아.”
내가 말했다.
“……그게 안 되는걸.”
나오가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미오, 평소랑 달리 왠지 기운 없어 보였고. 카렌도 저번에 같이 우즈키를 봤잖아. 역시 우리들 일 때문인가 싶어서…….”
저번이라면 며칠 전에 연습실을 나오다 마주친 것 말인가. 분명 그 때의 우즈키는 인사를 하면서도, 평소의 밝은 미소가 아닌 어딘지 어색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걸 떠올리자 나 역시 가슴 한구석 어딘가가 찔려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티를 내고 싶진 않았다. 나는 턱에 힘을 주고 고개를 빳빳이 든 채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왜 나오가, 우리가 죄책감을 느껴야 해? 우리가 린한테 같이 유닛을 짜자고 사정을 했어, 뉴제네를 그만둬 달라고 했어? 우린 그저 데뷔하고 싶을 뿐이야. 그게 그렇게 잘못이야?”
“지, 진정해. 카렌. 혈압 오를라…….”
“……그렇게 환자 취급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 좀 그만둬.”
내가 날카롭게 말하자 나오의 얼굴이 약간 빨개졌다. 나는 답답해져서 고개를 돌리고 벽 쪽을 쳐다보았다. 평소보다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왜지,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 거지. 아까 프로듀서랑 그런 얘기를 해서 그런가…….
“……미안해.”
나는 여전히 벽에 시선을 둔 채 입을 열었다. 나오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지금 좀 짜증이 나서, 심하게 말했던 것 같아. 아까까지 프로듀서랑 같이 있었거든.”
“……뭐, 프로듀서랑 같이 있으면 좀 짜증나긴 하지.”
나오가 그렇게 말하며 살며시 웃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맞아.”
나오는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카렌이 부러워. 언제나 솔직하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으니까. 나도 그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솔직하고 당당하게 내 요구를 남들에게 드러낼 수 있는 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히스테리를 부리던 환자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에는 지금보다 더 무기력하고 예민해서, 하루 종일 병원 침대에 누워 나에게 잘해주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기억들이다.
나 머리 아파, 목말라, 배고파, 이건 맛이 없어. 추워, 히터 좀 더 세게 틀어줘. 이젠 너무 덥잖아. 어디 가? 언제 와? 너무 시끄러워, 볼륨 좀 낮춰. 약 먹기 싫어. 왜 그런 눈으로 봐? 내가 이렇게 된 게 내 잘못이야?
내 잘못인가?
나오가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린이 곤란해진 것도, 우즈키나 미오가 기운 없이 다니는 것도…….
린에게 트라이어드 프리무스에 들어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달라고 말하면 안 되었던 걸까.
아니, 그렇지 않아.
아니, 맞아.
아니, 모르겠어.
나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두 손을 양쪽 관자놀이로 가져가 꾸욱 눌렀다. 아주 익숙한 감각이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던.
“카렌……? 너 괜찮아?”
나오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어왔다. 나는 내가 어느새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인 채 쭈그려 앉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재빨리 일어나서 일부러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괜찮아. 잠깐 피곤해져서.”
“정말로 괜찮아?” 나오가 불안한 듯이 재차 물었다.
“괜찮다니까. 자, 우리도 그만 가자.”
확신에 찬 내 대답에도 나오는 어두워진 표정을 풀지 않았다. 나는 화제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있지, 나오. 나중에 린이랑 다시 대화해보자.”
“어?”
“전에는 내가 너무 성급하게 말했던 것 같아. 트라리어드 프리무스에 대해서, 너무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볼래.”
내 말을 듣자 나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이번엔 다른 이유로 가슴 한쪽이 찔려왔다. 나 자신과 나오에게, 그리고 곧 린에게도 거짓말을 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데뷔를 하고 싶은 건 사실이다. 아이돌이 되기로 결심했을 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흘러가 버렸다. 그렇다고 해도 가장 친한 친구인 린, 나오와 함께 유닛으로 데뷔할 수 있다면 그 정도는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미움 받고 싶지 않아, 그 두 사람에게만은.
짐을 챙기고 회사 건물을 나오며, 나오가 옆에서 다시 괜찮냐고 물어왔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한 뒤, 석양을 등지고 걸어가며 힘차게 말했다.
“이제 그 때처럼 아프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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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나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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